“처음엔 ‘엄마, 니 묵어라’ 그랬죠”
“처음엔 ‘엄마, 니 묵어라’ 그랬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9.0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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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나들이 앞둔 베트남 여인 이은빈씨
“식사할 때 시어머니 말씀 그대로 따라 해서 ‘엄마, 니 묵어라’ 그랬죠.”

부끄러움도 잠시, 본의 아닌 실수를 웃음으로 버무린다. 천성이 밝아서일까, 스스럼없고 구김살도 없다. 울산 시집살이 7년차 베트남 여인 이은빈(27·울산시 북구 화봉동 화봉주공아파트)씨. 처음엔 한국말을 전혀 몰라 그랬지만, 존댓말은 아직도 넘기 어려운 벽이다.

베트남 이름 ‘레티투히엔’. 그녀는 지금 설빔 기다리는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거린다. 친정나들이 티켓이 용케도 손에 쥐어진 때문이다. ‘울산광역시 다문화가정지원센터’ 이미화 총괄팀장 덕분이었다.

그리던 고향 ‘사달람’은 9월 8일이면 만난다. 12일까지의 닷새간 여정은 울산 여성단체 대표들을 비롯해 20여명이 함께한다.

친정마을 ‘사달람’은 호치민성 타이닌시에 속한 100가구 남짓한 작은 시골. 사탕수수 농사일 아니면 장사로 어렵사리 살아가는 곳이지만 늘 정겹고 그리운 곳이다. 그곳에는 예순을 훌쩍 넘긴 홀어머니(67)가 외국바람이 난 막내딸의 친정나들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남 4녀 중 막내인 그녀가 어머니를 뵌 것은 햇수로 4년 전. 오빠의 결혼식에 빠질 수가 없어 고향땅을 밟았고, 그땐 일곱 달 젖먹이 둘째를 보듬었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형아와 세 살 터울인 둘째는 어느새 네 살 개구쟁이로 자랐고, 베트남 외할머니 품에는 두 번째로 안길 것이다.

“우리 동네는요, 조금만 더 가면 캄보디아 국경선이 나오는데, 전 안 가요. 우리 엄만 장사하러 캄보디아에 가지만 우린 무서워요.”

고향은 늘 여름이지만 지금은 여름이 싫다. 한국의 겨울이 더 좋다. 울산 생활 초입엔 10월인데도 엄살이 심했지만…. 20도, 16도로 내려가면 발이 어는 줄 알고 양말 두 켤레에 덧버선까지 걸쳤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말은 채소장사 하는 시어머니를 도우며 시장바닥에서 배웠다. 그런 탓에 높임말은 잘 못해도 울산사투리만큼은 자신이 있다. 아들 둘 합쳐 네 식구나 먹여 살리느라 닥치는 대로 저자거리를 돌다보니 그리 됐다. 지금은 철거된 옥동 목요장터에서 전을 펴기도 했다. 옥동 다문화가정지원센터와 연을 맺은 것은 목요장이 사라진 후의 일이었고, 4년 만의 친정나들이도 그 덕분 아닌가.

“고급 한국어는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워낙 열심이어서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요.”

베트남 여인 ‘레티투히엔’씨를 동생처럼 보살피는 이미화 팀장의 귀띔. 은빈씨는 현재 이 팀장의 권유로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3개월 코스, 120시간짜리 다문화 강사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을 마치고 강사가 되거나 희망근로 자리라도 나면 월 80만 원쯤은 너끈히 손에 쥘 수도 있다. 식당 주방장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꿈꾸고 있는 16년 연상의 장애인 남편 차영대(43)씨의 어깨를 어느 정도는 가볍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방의 울산 큰애기는 여전히 고달프다. 시집살이 처음부터 그랬듯이 식솔 뒷바라지가 여간 숨차지 않다. 친정나들이도 ‘빈손’ 걱정에 꺼렸지만 남편의 격려가 결심을 굳히게 했다.

“형편 나아지면 딸 하나 더 낳고 싶어요.” 미소 짓는 얼굴엔 귀여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 김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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