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새가 노래하는 곳 -5
울새가 노래하는 곳 -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0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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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supil49@naver.com

그때 머리 위로 울새 한 쌍이 날고 있는 게 보였다. 울새를 올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저길 봐! 저 새가 울새야.”

“아, 저 새였어? 그런데 울새의 소리가 마치 휘파람 소리 같이 들리는데.”

“새소리가 휘파람 소리 같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잠깐 휘파람을 불어 볼 테니 들어 봐?”

그의 말대로 그가 부는 휘파람 소리가 울새 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같았다. 십이 년 전, 고사리밭 언저리에 놓인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할 거니까.’란 그 말은 세월이 지나도 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그 고사리밭 어디에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할 거니까.’하고 말하던 그도 없고, 그가 하던 그 말을 듣고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나도 없다. 지나간 모든 시간은 박제되어 내 기억 속 깊숙한 곳에 보관된 금고에 자리하고 있어서 쉽사리 꺼내 볼 수도 없다. 게다가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난 탓에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고사리밭에서 있었던 갖가지 추억은 아직도 자주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다.

◇ 이상한 인연

기억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보관된 기억은 그 깊이 또한 바다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 기억의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누가 짐작이나 할까. 어쩌면 지금 나는 과거에 존재했던 시간, 현재는 존재하지 않은 시간에 이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 곧 기억의 바다가 마음속에 차오른다.

참, 이상했다. 아마도 기억은 나 자신이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중요한 일들을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도록 깊숙한 금고 속에 보관해 둘 필요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일 년 전의 기억은 꿈속의 일처럼 아득하기만 한데 십이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어제 겪은 일인 양 세세한 부분까지 내 기억의 바닷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실제로 그곳에 있을 때 나는 주변의 풍경이나 공기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딱히 그곳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공기가 맑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그날그날 해결해야 할 일만으로도 삶이 벅찼다.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고 아버지에 대에 생각하고 작은오빠에 대해 생각하고 언니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 참. 내게도 한 가지가 있긴 했다. 나는 잠시나마 사랑에 빠졌었다. 사랑? 그런 걸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맞아. 그런 감정이 바로 사랑이었어. 그러나 그 사랑은 열아홉의 나를 혼란의 늪으로 끌고 갔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와 나는 참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고사리를 꺾으러 산에 갈 참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뒷짐을 짓고 마루를 왔다 갔다 하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돌아보며 말을 했다.

“진실아, 오늘이 점식이 아우의 생일이 아니더냐. 홀아비가 자신이 먹겠다고 어디 미역국이나 끓였겠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미역국이나 끓여서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게 해주자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밥도 짓고 미역국도 끓이고 평소 점식이 삼촌이 좋아하는 부추전도 굽기 시작했다. 나름 생일상이 다 차려졌을 땐 이미 산에 오르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고사리 꺾는 일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배낭을 메고 능선을 올랐을 땐 이미 어둠이 골짜기를 덮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거세게 불어와 숲이 파도처럼 흔들리고 산쑥 덤불과 고사리밭이 통째로 몸을 떨며 바람에 허리를 낮추고 있었다. 때마침 산을 내려오고 있던 머리가 하얀 노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를 힐끗 쳐다보던 노인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렇게 저물녘에는 산에 오르지 않은 게 좋아. 짐승 같은 어둠이 이내 숲을 삼켜버리게 되거든.”

노인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평소 오르던 길이 아닌 지름길을 택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상수리나무에 붙어있는 표고버섯이었다. 그 모습은 흡사 동그랗게 생긴 브로치 같아 보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도톰하게 생긴 펜던트를 떠올리게 했다. 표고버섯 전은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다. 나는 정신없이 표고버섯을 따서 배낭에 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배낭이 불룩해져 있었다. 나는 불룩해진 배낭을 메고 어둠이 덮고 있는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앞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 어둠은 평소 내가 보아왔던 어둠과는 확연히 달랐다. 먹구름을 몰고 온 어둠은 회색도 아니요. 그렇다고 검은색도 아닌 것이 공포감을 떠올리게 하는, 교활한 술책이 그 어둠 속에 담겨 있는 듯한 야릇한 어둠이었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확연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조금씩 지형이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발아래서 밟히고 있는 흙의 감촉도 달랐지만 한 발 한 발씩 떼어 놓을 때마다 발이 옴폭옴폭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 역시 그랬구나. 상수리나무 숲이 끝나가는 지점에는 아득한 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모래는 아니었으나 모래처럼 건조한 느낌의 흙이 깔려 있었다. 내가 표고버섯에 정신이 팔려 그만 길을 잃고 말았구나! 생각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를 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도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날처럼 당황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텅 빈 토굴집에서 막내딸인 내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 생각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머릿속에서 악몽과도 같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던 까만 들쥐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여우의 모습이었다. 가느다란 몸통과 짧은 꼬리, 붉은 털과 크고 뾰족한 귀를 보게 된 순간 나는 단박에 그것이 여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여우는 미끄러지듯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쪽을 지나치면서도 왜 나는 그 여우를 보지 못했을까? ▶6화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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