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애민정신과 기록정신
수원화성, 애민정신과 기록정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01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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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화성(華城)이 있다. 멀리서 보면 장엄하고 가까이서 보면 아주 섬세하다. 성곽을 따라 걷고 난 후 수원화성박물관에 들러 축성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나면 당시 임금의 개혁 의지와 기록 정신이 놀랍기 그지없다. 화성의 역사는 조선조 중후기 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아래에 군사와 행정, 상업 기능을 갖춘 자족 신도시 구상에 들어갔다.

화성의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이다. 2층 누각과 장안문을 반원형으로 두른 옹성이 시선을 끄는데, 장안문을 보호하고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것은 당시 실학자들이 동서양의 요새를 연구하여 ‘공심돈(空心墩)’과 함께 공격과 방어 양식의 성곽을 도입한 것이다. 1796년 9월에 장안문, 팔달문 등 4대 문을 중심으로 한 6km 가까운 성벽이 완료되었다. 착공한 지 32개월 만에 읍성과 산성이 결합된 화성을 축성한 것이다. 550여 칸의 화성행궁이 완공되었음도 물론이다.

동원된 인력은 모두 수천 명에 달했다. 376명의 관리직과 1천821명의 장인이 투입되었다. 이 중 석수가 642명, 목수가 335명이었고 그 외 기와와 벽돌장, 대장장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품삯은 당연히 단순 노동자들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지급하여 전문 장인에 대한 예우를 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일반 인부의 경우 매일 2전5푼 정도가 지급된 데에 비해 장인들의 경우는 매일 4전2푼씩이 지급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축성에 필요한 수레 우마로 소 688마리, 말 252마리가 활용되었다. 돌은 한 마리가 모는 발거((發車)부터 40마리가 모는 대거(大車)까지 다양했다. 장정 4인이 모는 동거(童車)와 썰마(雪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 유형거(遊衡車)라는 수레를 사용한 바 있는데, 이는 대거와 썰매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정약용이 고안한 여러 개의 도르래를 이용해 돌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리프트)’와 고정 도르래를 이용하여 돌을 높이 들어 올리는 ‘녹로(=크레인)’도 크게 기여했다.

일당 지급과 성과급제를 병행하였다는 점도 조기 완공에 기여했다. 그 이전에는 강제 징발된 무상 부역꾼들이 공사를 맡았다. 대신들은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축성에 참여했던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곽이 갖추어지면서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에 옮겼다. 관아와 향교,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시설을 마련했다. 또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 244호,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 비용을 지원하였다.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을 풀어주고,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은전을 베풀었다.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별도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도 시행했다.

읍민들을 위해 거액을 투입하였다.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의 저수지를 만들었고 둔전도 일구었다. 오늘날 수원이 농업생명과학 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가 이때 비롯된 것이다. 금융을 지원하여 제지공장과 두부공장을 차리게 했다. 팔달문 밖의 남시장(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성안시장)을 조성했다. 이렇듯 정조 임금의 배려 덕분에 많은 외지인이 수원으로 이주해 왔다. 멀리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 후손들의 수원 이주는 특별한 예가 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애민정신과 치밀성이 낳은 완벽한 성곽이자 계획도시였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기록 정신의 정수, <화성성역의궤>이다. 축성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이 ‘의궤’는 공사 계획과 운영 과정, 참여자, 소요 경비, 자재, 공법 등 모든 전모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도설’은 건축 도면을 연상시킬 만큼 세세하다. 당시의 수원화성 추진과정은 오늘날 모든 정부 부처가 본받아야 할 역할 모델이 아닌가 싶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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