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결혼이 불행해지는 이유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결혼이 불행해지는 이유
  • 이상길 기자
  • 승인 2024.01.2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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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사랑은 성욕이다”라고 말했다. 사랑을 저급하게 다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있는 그대로 ‘진짜’를 이야기하려는 실존주의(實存主義)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사랑에 대한 이같은 정의는 아름답진 않아도 현실적일 순 있다. 생각해보시길. 지금 한창 뜨거운 커플에게 ‘영화를 보는 것’과 ‘침대로 가는 것’ 두 종류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지. 영화 외 쇼핑이나 여행, 산책, 등산 등등 뭐든 결국 마무리는 침대가 아닐까. 왜? 섹스란 게 연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즉 행복한 일이니까. 다들 행복을 위해 사는 만큼 쇼펜하우어의 사랑에 대한 정의도 이젠 조금 이해되지 않나.

헌데 그렇게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다들 결혼을 하는데 정작 결혼을 하면 예상 밖의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연애가 길어져도 비슷하겠지만 연애시절의 그 뜨거움이 점점 식어간다는 것. 사실 남자 입장에서 더 당황스럽다. 뜨겁던 시절엔 눈이 벌게서 덤볐는데 점점 식어가는 자신을 보자니 말이다. 미안한 남편은 아내에게 잠자리 빼고는 더 잘해주려 하지만 아내는 식어버린 남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거나 괜히 공허해지곤 한다. 결혼이란 게 연애할 때와는 달리 일이 많아진다. 그래도 연애 시절의 그 뜨거움만 계속 유지된다면 오히려 신나게 그 일들을 해내지 않을까. 허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결혼은 힘이 든다. 쉽게 공허해지고.

결국은 우주 공간 어디서든 어떤 존재도 피할 수 없는 ‘열역학 제2법칙’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라 위치에너지나 운동에너지 등 다른 에너지들은 전체 에너지량이 보존되면서 자유자재로 에너지의 형태가 전환이 되지만 ‘열에너지’만은 항상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는 것. 그러니까 주전자에 물을 넣고 아무리 뜨겁게 끓여도 시간이 지나면 물은 이내 식어버린다. 그리고 식어버린 물이 다시 뜨거운 물로 전환되진 않는다. 결국 남녀 간의 뜨거움이 식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이야기. 해서 실존주의 철학자인 니체는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혼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정이 부족해서다”. 노력하면 다시 뜨거워질 수 있다고요? 피식. 감히 장담하는데 그건 영화 속 세기의 커플로 <타이타닉>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라도 어려울 거다.

서론이 길었는데 실제로 샘 멘더스 감독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주인공으로 <타이타닉>의 두 주인공인 레오와 케이트를 의도적으로 캐스팅해 제목과는 달리 “결혼은 전혀 ‘혁명적인 길’(Revolutionary Road)이 아니며 설령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가 결혼을 해도 이럴 것”이라고 보여준다. 그러니까 식어버린 사랑 앞에 서로 몸살을 앓게 될 거라고. 여주인공 이름이 ‘에이프릴(April)’인 것도 실제 타이타닉이 1912년 4월(April)에 침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영화 속에서 이미 오래된 부부인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프랑스 파리로의 이주를 놓고 다투게 된다.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며 에이프릴은 미국 뉴욕 맨하탄 교외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랑스 파리로의 이주를 꿈꾸고, 마침내 남편 프랭크도 설득시키지만 그게 어그러지면서 불행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십수 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나도 꿈을 찾아 떠나려는 여자와 현실에 안주하려는 남자 간의 갈등으로 봤었다. 하지만 얼마 전 다시 보면서 다 개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둘 사이의 뜨거움이 식어서 그런 거더라. 서로 뜨거울 땐 손 잡고 동네만 걸어도 천국이거든. 파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에이프릴의 꿈이 어그러지기 전, 수학자지만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헬렌(케시 베이츠)의 아들 존(마이클 섀넌)이 프랭크 부부에게 말한다. 파리로 떠나는 이유에 대해 프랭크는 “공허하고 희망없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 말하고, 그의 대답에 존은 마치 실존주의 철학자처럼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실토하네. 공허한 건 많이들 인정하지만 ‘희망없다’고까진 말 못 하는데..”

그래도 다시 보니 파리행이 어그러지고 스스로를 자해하듯 심각한 상태가 된 에이프릴을 걱정하며 울부짖는 프랭크의 모습이 유독 눈에 크게 들어오더라. 그런 표정이 나오려면 대체 얼마나 사랑해야 할까. 만원짜리 지폐는 물에 젖어도 만원의 가치가 그대로이듯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말랑말랑했던 사랑이 점점 딱딱한 철근콘크리트로 변해가도 사랑은 사랑. 또 철근콘크리트란 게 대따(엄청) 비싸다. 지진이 나도 버티게 해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 편’이라는 이야기. 참,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 글은 2세라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두 사람만의 결실은 제외한 지극히 단편적인 썰(이야기)에 불과함을 이제야 밝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삼순(김선아)은 결혼이 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조각배 타고 태평양 건너는데 혼자 노 젓는 것보다는 둘이 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러고 보면 결혼이 노를 젓는 일이라면 우정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그지(거지) 같은 내 인생에 끼어들어 와선 함께 노를 저어주는 만큼 고맙지 않나.

2009년 2월 19일 개봉. 러닝타임 118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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