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 -4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 -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25 21:1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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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il49@naver.com

내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억새풀을 잡아당기면 손가락이 끊어질망정 절대로 억새가 잘리는 법이 없다더군. 오히려 사람이 처녀바위의 가랑이 사이에 나 있는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갔지.”

“억새가 그렇게 질겨.”

“응. 억새는 질길 뿐만 아니고 모서리가 칼날 같아. 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펄벅이 쓴 대지란 소설에서도 여주인공이 밭에서 일하다 갑자기 산기를 느껴 그녀는 억세 하나를 잘라 급히 집으로 달려간 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아기를 낳고는 그 억새로 탯줄을 자르지. 억새가 그 정도로 날카로워.”

“그럼 억새가 풀이 아니잖아. 억새로 된 칼이지.”

“말 된다. 억새 칼. 와! 그 표현 멋진데. 시적이야. 하하하.”

“넌 오늘 참 이상하다. 왜 자꾸 무서운 얘기만 하는 것이야. 처녀바위도 그렇고 억새 칼도 그렇고.”

“무서운 얘기를 하니까 더위가 싹 가셔서 좋잖아. 하하하.”

“더위가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소름이 돋는구먼.”

“그 바위의 이름을 왜 처녀바위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여인바위, 엄마바위, 그게 아니면 할머니바위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어. 그러니까 몇 년에 한 번씩 그 처녀바위를 찾아가서 술을 마시다 사라져 버리는 사람, 그것도 반드시 여자가 아닌 남자, 꼭 총각만 그렇게 사라진다나 봐.”

그는 말을 하고 나서 내 손을 쥐었다. 그를 힐끗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바위는 순수한 처녀바위가 아니잖아. 처녀귀신바위지.”

“귀신 자가 붙으면 무섭잖아.”

“귀신 자가 안 붙었어도 무섭네 뭐.”

“오래전에 처녀바위에 간 사람 아니, 총각 한 사람이 사라져 버린 일이 있었다는 거지. 지금은 아니야.”

“별로 기분 좋은 바위는 아니네.”

“신경 쓰지 마. 맹세코 내가 그 처녀바위에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절대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할 거니까.”

그때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들려주었던 그 말은 고사리밭 위로 쏟아지고 있는 따사로운 햇살처럼 내 안에 쏟아져 무지갯빛으로 자리 잡았다. 그날 이후부터 내 머릿속은 온통 그의 생각으로 꽉 채워졌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산에 오를 때도, 고사리를 꺾고 있을 때도 온통 그의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너무 완벽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고 상대적으로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곤 했다. 그를 힐끗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응.”

“근데 넌 왜 나 같은 애를 좋아하는 건데?”

“좋은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너와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좋아.”

“바보.”

“나 바보 아냐. 나름 똑똑하다고. 하하하.”

“너 정도면 얼마든지 제대로 된 사람과 사귈 수도 있을 텐데.”

“제대로 된 사람의 기준이 뭔데?”

“뭐랄까. 너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고… 근사한 대학에 다니는.”

“그건 네가 생각하는 기준이고 나는 달라. 일단 내 눈에는 네가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보이거든. 하하하.”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못돼. 그리고 지금 네 감정은 착각일 수도 있어.”

“물론 그럴 수도 있을 테지.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표현하는 어휘들은 질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자신이 아닌 외부세계로부터 적용하는 판단의 기준에 따라서만 적용될 뿐이지. 난 말이야.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내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

그날 이후부터 나는 이따금 저렇게 멋진 수호와 결혼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5화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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