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의 자연산책] 십리대숲의 역사를 찾아서
[조상제의 자연산책] 십리대숲의 역사를 찾아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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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자랑거리, 울산의 미래 먹거리, 울산 12경 중의 하나인 십리대숲. 그 대숲은 언제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1938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발행한 <조선의 임수(林藪)>라는 책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금석문, 고문헌 등을 참조하고 현장을 직접 방문·조사한 후 쓴 책으로 2005년 (사)생명의숲국민운동에서 번역했다. 이 책의 ‘경상남도 울산’ 편에는 태화강 죽림(太和江 竹林)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다음은 비설(?說) 부분의 기록이다.

“울산은 예부터 대나무 생산지였다. 읍 앞을 흐르는 태화강 일대에 죽림이 형성된 것은 1399년 이래다. 후세에 점점 베어져 1915년에는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죽림은 1917년부터 1932년까지 순차적으로 조성되었고, 경작지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수해방비림이라 생각된다.”

“숲 뒤쪽의 경작지는 죽림으로 인해 홍수 시 모래·자갈의 유입을 막고, 비옥한 세토(細土)만 퇴적되면서 충적토(沖積土)가 형성되어 그 두께가 한 척(尺)에 달한다. 죽림을 조성하기 전의 반(反=300평)당 생산량은 보리가 3두(斗)였고, 1반보(反步=300평)의 땅값은 30원(圓)이었는데, 지금은 보리가 1석(石) 5두, 벼가 3석 생산되며 1반보의 지가(地價)는 240원이 되었다고 했다.”

“태화강 죽림은 울산 읍내에서 3km 떨어진 태화강 북안(北岸)에 있고, 연장 길이 1천200m, 폭 20~40m, 면적 4ha의 하반 평탄지다. 둘레 20cm의 왕대가 반(反=9.917a)당 900~1천500그루가 자란다. 드물게 대나무 둘레가 30c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도쿠미츠 노부유키(德光宣之)는 “임수(林藪)란 산록(山麓) 이하부터 수변에 이르는 평지대의 수림에 해당하며, 근고(近古)의 고전에 수림을 권고·강요하는 기록이 있어 반도 문화의 특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조선의 임수>에는 전국 108곳의 수림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바람과 홍수를 다스리고 산사태를 예방하는 등의 목적으로 국가에서 다양한 수림을 조성했으며, 울산 태화강가 대숲도 이런 목적에 따라 조선 초기부터 여러 곳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온전한 모습의 십리대숲을 갖추게 된 것은 1930년대 전후의 일로 보인다.

한편 <태화강국가정원 백서>나 일부 언론 보도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오산 대밭은 내오산 아래에 있는 대밭이다. 일제 때 큰물이 져서 이 일대가 백사장이 되어 있을 때 북정동에 사는 일본인 오카다(岡田)가 이를 사들여 대를 심었다. 이 대밭은 두루미들이 밤에 잠을 자는 서식지였다.(1986 울산지명사 인용, 국가정원 백서 37쪽)” “십리대숲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장됐다. 대숲을 넓게 확장시킨 인물은 일제강점기 울산수리조합 창립위원인 오카다 쵸우베이였다.(울산경제신문. 2023.12.10. 신형석)”

1960년대 초의 십리대숲.
1960년대 초의 십리대숲.

위의 인용 글에서 오산대숲에서 ‘두루미가 잠을 잔다’는 것은 뜻밖이다. ‘두루미’는 학(鶴)의 순우리말로 학이 밤에 대밭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학은 포식자를 피하려고 주로 얕은 물에서 잠을 자고, 전 세계적으로 1천500~1천6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겨울 철새다.

울산은 학성공원, 학성동, 학산동, 무학산 등 학(鶴)과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 있고, <울산승람>에서도 1954년도에 청량과 범서에 학이 날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두루미가 대밭에서 잠잔다’는 것은 백로를 두루미로 오인한 데서 온 잘못된 표현으로 보인다. 지금 백로류들은 삼호철새공원 대숲에서 잠을 잔다. 옛날에 백로들이 오산 쪽 대숲에서도 서식했는지는 고증(考證)이 필요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큰물이 져서 대나무를 심었다는 일본인의 이야기도 의문스럽다. <조선의 임수>라는 책에서는 1938년 무렵인데도 대숲의 거의 온전한 모습이 서술되어 있어, 이 일대가 다 백사장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만 홍수로 유실되어 대나무를 보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화강이 넘치면서 태화강가 대숲이 유실되어 대나무를 보식한 것이 어느 해인지, 보식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해 보인다. 혹시 오카다의 후손들이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상제 ‘울산 민물고기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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