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칼럼] 키오스크 앞의 앨리스
[독자 칼럼] 키오스크 앞의 앨리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2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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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카페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료를 픽업하고 앉아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고 있을 때 한 노년 커플이 들어왔다. 과감한 색감의 숄을 두른 여성과 챙이 짧은 페도라=중절모)를 쓴 남성이 카페에 처음 방문한 듯 찬찬히 안을 둘러봤다. 젊은 사람 못지않은 패션 감각에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그들에게 머물렀다. 필자도 속으로 나도 저렇게 여유 있고 자신감 있게 늙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 다시 후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후배는 주택담보대출 갈아타기에 대해 얘기하며 잔뜩 흥분했다. 카페 안 역시 사람들의 수다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뜨거워져 있었다. 싸늘히 식다 못해 짜증 섞인 목소리가 홀을 날카롭게 찢어놓기 전까지는.

“손님, 저기 매뉴얼 있으세요! 그거 보시면 돼요.”

“아니 저기… 봤죠. 봤는데. 뭔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메뉴 준비에 정신이 없던 직원은 흰 우유를 따르다 말고 짜증 섞인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이상하다고요? 다른 손님들은 어떻게 주문을 해요 그럼.”

“저기, 이상하다는 게 그 뜻이 아니라…….”

“손님, 그럼 좀 기다려주세요.”

숄을 두른 여성은 아까와 달리 주눅이 든 채로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였고 페도라를 쓴 남성은 무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뒤를 돌았다. 그들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키오스크 사용법을 설명해 주려 했으나 그들은 고맙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흔한 프랜차이즈였다면 몰라도 우리가 찾은 카페는 개인 카페로 키오스크의 주문 과정 및 UI는 내게도 익숙지 않았다.

싫든 좋든 신신익선(迅迅益善)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세상의 변화에 개인은 적절히 반응하며 따라가 줘야 한다. 그러나 특정 세대를 거의 배제하는 수준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의 나이가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새로운 키오스크 앞에 서면 역시 긴장하게 된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느린 속도를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긴장하면 실수하게 되고, 실수하게 되면 도망치고 싶어진다. 한 번 민망한 경험을 하게 되면 점점 더 적응하기 어렵게 된다.

변화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그 점원을 비난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 점원은 키오스크 대신 줄어든 인원수만큼 늘어난 일에 허덕이고 있었으니까. 문맹, 컴맹을 넘어 이제는 새로운 정보 혁신의 물결을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계속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앨리스가 묻는다. “계속 뛰는데, 왜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붉은 여왕은 답한다.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차가운 거리로 쫓기듯 나가던 커플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속도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 문제는 비단 세대의 문제만도 아니다. 젊은 세대에서도 개인 간 격차가 존재하니까. 지금의 젊은 세대도 언젠가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달리라고 재촉하는 붉은 여왕을 맞게 될 날이 반드시 올 테니까.

그런 정도는 그저 어쩔 수 없는 간단한 부작용(side effect)이니 조용히 넘어가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의 낙오를 기본값으로 갖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물질만능주의로 점철된 약육강식의 세계일 뿐이지 않을까…….

김영석 ‘도서출판 카논’ 대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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