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
영화 ‘러브레터’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1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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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 사람들에게 90년대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20대를 그 시절에 보냈기 때문. <우리들의 천국>이나 <내일은 사랑> 같은 캠퍼스 드라마가 시대의 낭만을 장식해주던 시절이었지.

이 나라의 역사에서도 그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비록 IMF라는 아픔이 있긴 했지만 이른바 ‘대중문화 중흥기’라 불리며 각 분야에서 세상 전체가 떠들썩했다. 문민정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 최초의 정권교체, 김일성 사망, 슬램덩크,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 김건모, 잘못된 만남, 역대급 무더위의 94년 여름, 마지막 승부,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느낌, 모래시계, 남자셋 여자셋, PC방,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 아이러브스쿨, 스카이러브, 세이클럽, 터미네이터2, 타이타닉, 쉬리 등등. 오죽했으면 <응답하라>시리즈도 90년대를 배경으로 두 편(1994,1997)이나 만들어졌을까. 헌데 그런 <응답하라>시리즈에서 소품으로 등장하진 않았지만 내 90년대의 끄트머리를 뒤흔들었던 사건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이와이 šœ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본 일이었다.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98년 10월이었으니까 대략 97년 겨울로 기억된다. 그해 1월 제대를 한 뒤 2학기에 복학을 했고, 고등학교 친구이기도 한 하숙집 룸메이트의 손에 이끌려 전설의 일본 멜로 영화 <러브레터>를 영접하게 됐었다. 잠깐, 일본대중문화 개방 전에 <러브레터>를 봤다고? 그랬다. 당시 학내 한 단과대학 영화동아리가 일본 영화에 아직 생소한 학생들을 위해 으슥한 지하 강의실에서 <러브레터>를 상영했던 것. 다시 말해 불법 상영을 통해 불법적으로 관람하게 됐었다. 물론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하는 자백이지만 일상적이고 평범한 합법이 아닌 사고를 치듯 불법적으로 <러브레터>를 봤기 때문에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추억은 왜 불법과도 친할까? 아니, 어떨 땐 더 친한 거 같다. 의자도 없는 바닥에 친구랑 나란히 앉아 흰색 천으로 대충 만들어진 소형 스크린을 통해 본 <러브레터>는 마치 추운 겨울밤, 작은 방에 전기 히터를 틀어 놓고 듣는 라디오처럼 포근하고 특별했다. 거기다 동틀 무렵 두껍게 쌓인 첫눈을 처음으로 밟듯 <러브레터>가 전하는 첫사랑의 아련한 감동이란. 본 사람들은 다들 인정하겠지만 천년이 지나도 대체 불가한 ‘불멸의 멜로영화’로 남을 작품이 아닐까 싶다. 해서 그때 이후 난 겨울만 되면 통과의례처럼 <러브레터>를 다시 보곤 했었다.

참, <러브레터>는 2년 전 산에 오르다 조난을 당한 첫사랑이 그리워 그가 고등학교 시절 살았던 오타루시의 주소를 우연히 알게 돼 그곳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지를 보낸 이는 지금 고베시에 살고 있는 여대생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였고, 2년 전 죽은 그녀의 첫사랑은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였다. 그러니까 그리움에 사무쳐 그냥 천국으로 러브레터를 보낸 것. 그런데 이미 도로로 변해 주소가 사라진 그곳에서 기적처럼 답장이 왔다. 그것도 ‘후지이 이츠키’로부터. 하지만 그 후지이 이츠키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의 이름이 같았던 여자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였고, 히로코는 죽은 첫사랑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그녀의 편지를 통해 듣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장면 전환을 통해 고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소년’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와 ‘소녀’ 후지이 이츠키(사카이 미키)의 이야기로 가득 차게 된다.

다시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러브레터>는 고교 시절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가 백미다. 2년 전 죽어서 자라지 못한 추억 속의 소년과 이땐 아직 앳된 소녀가 워낙에 매력적인데다 소녀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하는 소년의 표정과 행동들이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기 때문. 헌데 올 겨울에 다시 보니 그동안은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소년의 의미 있는 행동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 <러브레터> 최고 명대사로 히로코가 눈밭에서 외쳤던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시나요?)”에 묻혀서 그렇지 도서관에서 소녀에게 5장의 도서 카드를 내밀며 말했던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도 불세출의 명대사로 느껴졌던 것.

눈부시게 표현된 그 장면에서 소년이 도서카드에 쓴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은 자신이 아닌 소녀의 이름이었고, 포커 게임의 한 패인 ‘스트레이트 플러쉬(Straight Flush)’는 직역하면 ‘직선으로 흐른다’는 뜻. 그러니까 사진(스틸컷) 속에서 소년은 저렇게 도서 카드를 소녀에게 건네며 장난을 치지만 실은 소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직선으로 흘러 소녀에게 닿기를 간절히 원했던 게 아닐는지. 그치만 소년의 마음은 동력(용기)이 부족해 끝내 소녀에게 닿지 못했다. 허나 그랬기에 <러브레터>는 불멸이 되었다.

원래 그렇다. 사랑은 고백하지 않을수록 생명력이 강한 법.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이뤄지는 순간, 그날부터 하루하루 죽어가지 않을까.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하루하루 죽어가듯. 그 사랑은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혹여나 마음속에 담아둔 사랑이 있지만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해보시길.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 1999년 11월 20일 개봉. 러닝타임 117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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