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희의 공감수필] 겨울 하면 떠오르는‘핫팩’
[고은희의 공감수필] 겨울 하면 떠오르는‘핫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15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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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첫날, 일출을 보러 울산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일출 시각까지 2시간 반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구름이 짙어 해를 보지 못했다. 일출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예년보다 일출 관광객이 줄어든 듯했다. 이왕 바닷가에 왔으니, 집으로 가기까지 바닷가의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거닐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핫팩이 적당한 온도로 따뜻함을 전했다. 핫팩은 시간 차이로 온도가 달라 최고조일 때는 그 열기에 댈까 봐 염려스럽기도 했다. 은근하게 따뜻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고 가끔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체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핫팩을 공기에 노출하지 않고 잘 보관하면 24시간을 버티면서 우리에게 따뜻한 기온을 전한다. 핫팩이 없었던 시절에는 추위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살아온 날들을 더듬게 되었다.

전기밥솥이 보편화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아랫목 이불 아래에 늘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의 밥이었다. 식구들이 춥다고 이불을 서로 당기기라도 하면 밥이 쏟아지기도 해서 밥을 지키는 일에 공을 들였다. 스테인리스 그릇을 만지면 따뜻함이 전해져서 아랫목 이불 아래로 자주 손을 집어넣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핫팩처럼 따뜻함을 유지하게 해준 게 밥 한 그릇이 아니었나 싶다.

바닷가를 거니는데, 백사장의 인파가 몰렸던 장소에는 타다가 만 장작이 보였다. 철제 사각 통 안에 불을 지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장작불 주위에서 많은 사람이 손을 쬐기도 한 것 같았다. 또다시 걷다 보니, 어둑한 건물 공간에 핫팩이 보였다.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핫팩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길고양이를 위해 핫팩을 일부러 놓아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고양이들이 추위를 견뎌낼 수 있을지 큰 걱정을 한다. 핫팩을 이용해 물이 어는 속도를 늦추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핫팩만 놓아두면 위험할 수도 있다. 아랫목 이불 아래 밥그릇이 쏟아질 위험이 있듯, 길고양이가 핫팩을 밟으면 내용물이 쏟아질 수도 있다.

핫팩의 주된 원료로는 쇳가루를 비롯해 질석, 톱밥, 활성탄, 소금 등이 사용된다. 철이 마찰로 인해 산소와 만나 녹슬게 되어 열이 발생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모래와 비슷한 가루처럼 느껴지는 물질이 들어있는데, 덩어리보다 가루가 더 많은 마찰 면적을 제공하여 열을 잘 발생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성분으로 인해 핫팩 버리는 방법이 따로 있을 정도다. 핫팩이 뜯어지지 않게 하려면 수면양말과 같은 천 안에 넣고 묶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다.

아랫목의 밥이 쏟아지지 않게 보온을 유지하는 기구가 나온 적이 있었다. 밥그릇 모양의 스티로폼이다. 스티로폼 안에 밥그릇을 넣어서 아랫목에 두면 부피가 커서 밥그릇인 줄 알고 쏟아지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도구다.

친정어머니는 전기밥솥이 대중화해도 오랫동안 아랫목에 밥그릇을 놓아두었다. 밥통의 밥보다 솥밥으로 만든 밥이 더 맛있다고 여겨 늦게 들어오는 식구를 위해 맛있는 밥 한 그릇을 먹이고 싶어서였다.

핫팩의 따뜻함이 전해질 때,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옛날 일이 떠오른다. 카페에서 주문할 때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뜨죽아’(뜨거워 죽어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이유는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이 좋아서다. 이쯤 되면 겨울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핫팩’이 아닐까.

고은희 울산수필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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