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 -2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 -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11 21:37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런저런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오고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휘둘리지않고 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그러나 내 멍한 머리로는 매번 아무것도 결정하거나 선택하지 못했다.

별안간 점식이 삼촌이 재채기를 했다. 그 재채기 소리가 내 회상을 멈추게 했다. 나는 점식이 삼촌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가 계속 와서 삼촌이 엄청 힘드셨겠어요.”

“좀처럼 비가 멈출 것 같지 않더니만 막상 파묘 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장이 끝날 때까지 날씨가 그렇게 화창할 수가 없었어. 허허허.”

“감사한 일이네요.”

“형수님 산소만 이장한 것이 아니고 그쪽에 있던 다른 묘지도 죄다 이장할 수밖에 없었어. 하필이면 새 길이 그쪽으로 관통되는 바람에.”

“그러게요.”

“사실은 말이다. 형수님 묫자리 주변의 숲이 우거지면서 그늘이 덮고 있었거든. 이장한 곳은 나무도 많지 않고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들어서 오히려 잘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지난번 폭우가 얼마나 심했던지 산허리가 무너져 내려 물길처럼 쭉 내리뻗어있던 고사리밭 절반가량이 짓뭉개져 버렸어.”

고사리밭이 짓뭉개졌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가슴까지 짓뭉개지는 느낌이었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한 소녀의모습이 떠올랐다. 아담한 키에 동그랗게 생긴 얼굴 그리고 크고 까만 눈, 웃을 때 한쪽 볼우물이 옴폭 들어갈 때면 사람을 미소 짓게 했던 그 소녀.

긴 겨울이 지나고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던 어느 봄날, 소녀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행여 누가 먼저 고사리를 꺾을세라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이었다. 고사리는 주로 그늘로 드리워져 있는 음지에서 잘 자랐다. 음지에는 고사리뿐만 아니고 만나면 반갑지 않은 친구도 많았다. 그늘을 위장한 청개구리며 떼를 지어 기어다니는 개미들, 야행성인 지렁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말벌들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순간 온몸의 근육을 오그라들게 만들어버리는 뱀…….

어느 날 고사리밭 한쪽 모퉁이에 서 있는 밤나무 가지에 울새 한 쌍이 찾아왔다. 울새는 소녀와 친구 하는 것이 즐거운 듯 한나절 내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소녀는 윙윙대며 공격적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말벌이나 매번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뱀보다는 울새의 노랫소리를 더 좋아했다. 저물녘 고사리로 채워진 묵직한 배낭을 등에 메고 삐뚤빼뚤한 산길을 내려오고 있던 소녀를 떠올리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사실 나는 그곳에서 지낼 땐 풍경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고사리를 꺾는 일에만 신경 쓰기에도 벅찼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사리밭의 풍경이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너무도 선명해서 당장 내 앞에 그 고사리밭이 펼쳐질 것 같았다.

열아홉 살의 나는 어느 봄날 배낭을 메고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고사리밭 한쪽 모퉁이에 서 있는 밤나무는 하도 키가 커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매번 산에 오를 때면 그 밤나무를 보고 찾아가곤 했다. 밤나무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푸른 잎이 무성했다. 여름 내내 푸른 잎들은 알을 품듯 싱그러운 밤송이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역시 가을이었다. 가을에는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풍성한 밤송이들이 저마다 가슴을 활짝 열어 여름내 품고 있던 반들반들한 알밤을 드러내 보였다. 이따금 밤나무의 맨 꼭대기에는 울새 한 쌍이 찾아와서는 한나절 내내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번은 고사리를 꺾다 우연히 울새의 둥지를 보게 되었다. 지름이 한 뼘 남짓 돼 보이는 둥지 안에는 푸른빛 알 세 개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 보는 푸른빛 알이었다.

신기한 나머지 조심조심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주위를 빙빙 돌고 있던 어미 울새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날아올랐다. 아마도 그 어미 울새는 내가 자신이 낳은 알을 위협할 대상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결코 울새 알을 훔칠 마음을 먹었거나 해를 끼칠 뜻은 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어미 울새에게 내 진심을 알릴 방법도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밤나무 아래에는 길이가 어른 키만 하고 둘레 역시 어른 허리만 한 통나무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나는 이따금 고사리를 꺾다 잠깐씩 그 통나무에 드러눕고는 했는데 그날은 그 어미 울새를 생각하다 깜빡 잠이 들어있었다. 짹,짹,짹, 하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깼다. 그러나 그 새는 울새가 아닌 박새였다.

나는 그와 함께 산에 오를 때면 매번 그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3화로 이어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