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通의 우리 술 이야기] 백제를 닮고 싶은 술, 한산 소곡주 ⑤
[心通의 우리 술 이야기] 백제를 닮고 싶은 술, 한산 소곡주 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1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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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소곡주 축제가 열리는 한산을 찾았다. ‘명인 소곡주’ 나장연 대표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처럼 행사장을 종횡무진하듯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70여개 업체가 모여있는 한산 소곡주 경연장이었지만 주연은 단연 나 대표가 제조하는 명인 소곡주였다.

나 대표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손님이었다. 손님맞이로 바쁜 분을 잠시 붙들고 한산 소곡주에 누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물어보았다. “밑술 만들 때는 멥쌀 24kg으로 백설기를 빚은 다음 누룩 10kg을 물 80L에 풀어 수곡을 만들어 혼합합니다. 2~3일 후에 덧술을 하는데 찹쌀 80kg으로 고두밥을 쪄서 밑술과 섞고 여기에 누룩 20kg을 넣어 발효시킵니다.”

누룩이 쌀 양의 30% 정도라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한산 소곡주는 고(古)조리서에 있는 소곡주와는 확연하게 다른, 소곡주가 아닌 다곡주였던 것이다. ‘힐 소(素)’자에 30%의 누룩이 들어가는 소곡주는 고조리서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럼 한산 소곡주는 전혀 새로운 술이라고 해야 하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부재료로 ‘엿기름’을 넣는다는 나 대표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엿기름은 당화(糖化)와 관련이 있다. 전분을 당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엿기름이 들어가는 대표적인 음식이 단술이다. 새로 지은 밥에 엿기름과 물을 섞어 따뜻한 곳에서 하루 정도 지나면 달짝지근한 단술이 만들어진다.

맥주가 보리싹의 당화작용을 이용하여 만든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누룩에는 당화작용을 하는 효소가 있어서 굳이 엿기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드물게 엿기름을 사용하는 레시피가 있는데 계명주(鷄鳴酒)가 그것이다. 계명주는 저녁에 술을 빚어 새벽에 닭이 울 때 마실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속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곡물 죽에 누룩 외에 엿기름을 넣어 당화가 빨리 되게 해서 술을 만든다. “엿기름을 줄여갈 생각입니다.” 나 대표의 설명이 이어진다. 누룩이 많이 들어가고 100일간 숙성시키는데 굳이 당화력을 높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엿기름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엿기름은 누룩이 적게 들어가는 원조 소곡주의 당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넣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엿기름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서 누룩을 조금씩 넣다 보니 지금의 한산 소곡주가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고조리서와는 달라진 소곡주를 두고 ‘적을 소(少)’자를 고집하기가 민망해서 ‘흴 소(素)’자로 개명(?)하면서 백제의 멸망과 소복을 연계하는 스토리텔링을 꾸민 것이 아닐까? 법고창신(法古創新), 한산 소곡주는 그야말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맴돌았다.

한산 소곡주는 1979년 고(故) 김영신 여사에 의해 ‘충청남도 지방무형문화재 3호’로 등록된다. 전통주가 1981년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여사는 한산이 고향이다. 한산에서 나고 자라는 사이 집안에서 소곡주 빚는 것을 도우면서 자연스레 그 비법을 터득했으리라.

그러던 김영신 여사는 서천으로 시집와서 결혼생활을 하다가 생계가 어려워지자 다시 한산으로 돌아간다. 막걸리 담그는 것도 녹록지 않던 시절에 프리미엄급 이양주를 담았다는 것은 집안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말해준다.

나 대표는 김 여사가 다시 소곡주를 빚게 되면서 할머니를 따라 새벽에 샘물을 길어와 술을 빚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한다. 김 여사의 소곡주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집안의 대소사뿐만 아니라 지역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김 여사는 약방의 감초처럼 불려 다녔다. 김 여사가 출장(?) 다니는 사이 한산 소곡주의 레시피는 조금씩 조금씩 한산을 적셔갔다. (⑥으로 이어짐)

심규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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