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실의 소소살롱] 영감을 훔쳐라
[최영실의 소소살롱] 영감을 훔쳐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0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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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용의 해인지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SNS 피드에 귀여운 용, 무서운 용, 힘이 세 보이는 용, 다양한 청색의 용들이 올라오니 그제야 짚어본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살면서 십이간지가 네다섯 번쯤 돌고 돌아 무심해진 것도 있겠지만 일 년을 헐기 시작하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던지 금세 호랑이였다가 토끼였다가 용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잠시 시간을 정지시키고 시작과 끝에 점을 찍어 길게 한 줄로 이어본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고 면이 모여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열린다. 다시 첫 점을 찍기에 좋은 한 해의 시작 1월이다.

여러 신문 지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8년이 조금 넘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글은 읽어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족하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는 것만큼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 아직은 없는 듯하다. 책이나 지면의 글들은 소실되거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절판되어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온라인으로 아카이브 되어 검색되는 요즘은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다. 해서 나름의 원칙이 있어 스스로 감응하지 않는 글은 쓰지 않는 편이다. 억지로 써 내려간 글은 누가 봐도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늘 공감과 감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원고 마감일을 앞두고 몇 시간을 의자에 몸을 혹사하는 일을 하게 되는 날도 없지 않아 있다. 겨우 마침표를 찍지만 감응 없는 건조함은 내가 먼저 알아챈다. 그래서 첫 문장과 하고 싶은 주제가 선명하게 떠오르기 전까지 될 수 있으면 노트북을 열지 않는다. 대신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골라 읽으며 작은 것에 감응하는 일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써야 할 글을 두고 목적 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이 불안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일에 훨씬 근접했고 시간도 단축되었다. 글에 작가의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이들의 글을 읽을 때도 불변의 원칙이다. 넘쳐나는 글 홍수 시대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한 해의 시작에 첫 지면에 쓰일 글을 놓고 스스로 그 진정성을 상기하며 마음에 새긴다.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얼마 전 18세 최연소로 임윤찬이 우승했던 반 클라이번 대회를 다큐로 기록한 영화 <크레센도>를 보았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수백 명의 피아노 천재들의 경연 모습을 피상적으로만 짐작하였는데 고통과 긴장감을 고스란히 인터뷰나 영상으로 담아 공감대가 컸다. 반복되는 피나는 연습은 기본이었을 테고 거기에 자신의 해석과 감성까지 불어넣어 같은 작품을 다르게 연주해 나가는 한 명 한 명의 피아니스트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우승했던 임윤찬은 먼저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을 생각하며 연주했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은 세상에서 음악을 가장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현실 세계로 꺼내는 역할은 해야 한다고.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피아노 앞에서 기교나 기술을 연습하는 시간 대신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거나 돌아다니라고 말한 이가 있었다. 꽃 한 송이에서도 받을 수 있는 영감(靈感)이 창작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영화감독 짐 자무시의 말이 떠오른다. “영감이 되는 모든 곳에서 도둑질해라.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지 말라.” 그것이 곧 진정성을 가진 감응이다.

일상은 하루하루 반복되고 십이간지의 바퀴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 작은 것에 감응하는 공감 감수성은 그런 인간에게 선물과도 같은 감정이다.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받는 인류가 있고 지구는 병이 깊어지고 험한 뉴스가 나오는 시절 속에서도 어딘가에선 음악이 연주되고 시집이 나오며 영화가 상영되고 아이들의 웃음이 번진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누군가의 등 뒤를 밝히는 작은 빛이 시작되는 곳은 어딜까. 영감이 흐르는 곳에 자주 머무를 수 있는 목적 없는 발걸음의 진정성을 나는 믿는다.

최영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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