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너의 이름으로 산다
[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너의 이름으로 산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1.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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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이름보다 오래된-문선희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나태주, ‘풀꽃?2’ 전부>

문선희 작가가 찍고 쓴 ‘이름보다 오래된’은 생명에 관한 기록이다. 다만 인간 욕심에 의해 사라지고 지워지는 짐승, 그 이름에 관한 복원 시도다. 등장인물은 ‘고라니’. 지난 10년간 자신이 찾아가 만났지만 ‘짐승 취급받아온 존재’를 쫓아간다. 아니 더 나아가 그 이름들을 짓고 불러보는 숨 막히는 장면들에 관한 보고서다.

이렇게 시작된다. 이른 아침 차를 몰고 산길을 돌아가던 길, 도로 한가운데서 ‘사슴’을 만났다. 다급하고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잠시 후 흰 개 몇 마리가 나타났다. 그는 직감적으로 쫓기고 있음을 알았다. ‘사슴’이 ‘고라니’였음은 나중에 알았다.

이렇게 우연히 맞닥트린 사건 앞에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리. 만난 적 없었으니 기억 장치에서 무심코 사슴을 떠올렸으리라.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노루, 고라니도 사슴과에 속하니 말이다.

고라니는 순우리말이다. ‘노랗다’는 뜻이지만 뿔 대신 ‘송곳니’, ‘어금니’라는 의미로 고라니라 불렸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단다. 영문 이름은 Water Deer, ‘물사슴’이다. 물을 좋아하는 동물이다. 호숫가, 습지, 강가에 주로 서식하고 수영도 잘한다니 어울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유해야생동물’로 분류돼 있다.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지자체에서는 예산을 들여 이들을 퇴치하고 있다. 사냥꾼이 등장하고 현상금 붙은 목숨이 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제사회에서는 ‘멸종위기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많아서 천덕꾸러기 신세인 고라니가 사자, 하마, 치타, 코알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2014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3만 6천296원어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2018년에는 1만 4,869원어치 농작물을 먹은 죄로 죽었다. 고라니 한 마리 목에 내건 현상금은 3만원, 2015년부터는 현상금으로 지급된 비용이 고라니 농작물 피해보다 많았다. 더 웃기는 일은 포상금은 꼬박꼬박 지급했지만 농민들에게는 제대로 된 피해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이 아이러니를 기록한 작가는 이들에게 연민은 사슴 속에 숨겨두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갔다. 어떤 생명이라도 그 누구도 함부로 없앨 수 없다. 인간 욕심이 개발이라는 이유로 이들이 사는 곳을 침탈했다. 인간 식량을 축내는 존재라고 총을 함부로 들이대는 데 합의한 이유가 자명하다. 고라니에게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라고 말할 수 없다. ‘로드 킬’ 당하는 이들 잘못인가?

야생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인간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개발에 희생된 존재다.

야생동물 구조센터와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 내 사슴생태원에서 만난 이들에게 작가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초코, 망고, 보리, 땅콩이, 허둥이, 모모, 내래, 한쪽 눈이 없는 ‘자주’까지.

그간 200여마리 고라니를 만났고 50여장으로 간추려 고라니 초상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모두 비슷해 보였지만 그들을 점점 알아가면서 똑같은 얼굴은 없음을 깨달았다. ‘알아 간다’는 말은 상대를 더 이해하기 위해 ‘앓아가는 일’이다. 생명 존엄성은 미물(微物)에게까지 적용돼야 마땅하다.

작가는 2013년 구제역으로 땅에 묻힌 동물들을 기록한 바 있다. 처참 속에 묻힌 생몰(生沒). 당시 전국 4천779곳에 존재했던 매몰지 중 100여 곳을 다녔다. 그때 느낀 심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가 지옥을 줬다’는 한마디. 애도(哀悼)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왜 이런 장면을 외면하지 못하는 걸까? ‘작가’라는 말은 ‘대리자’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타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 책임은 무한하다. 외면하지 않는 대면이 더욱 절실한 시대다. 한쪽 편에만 서지 말고 상생(相生)하는 법을 깨달으면 좋겠다. 죽이고 살리는 문제는 우리 속 야만을 물리쳐야만 가능하다. 오늘도 ‘너의 이름’을 기억하며…

이기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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