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
[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2.2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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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한 장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은 늘 외롭다. 마음을 다 주어도 친구가 없는 개똥벌레처럼 세상은 잔인하고 인생은 어둡기만 하다. 버림받은 삶. 새벽어둠 속에서 잠을 깨 바라본 오스트레일리아의 바다는 야청빛으로 처량하기만 하고 삶의 모퉁이에 선 남자(소지섭)는 이미 죽음을 예감한다.

차가운 땅바닥 박스떼기 위에서 고이 잠든 소녀(임수정)의 숨소리가 바다의 근성을 잠재우고 착한 모닥불이 서서히 꺼져갈 때 사랑은 시작됐다. 외로움이 운명이라면 사랑도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떠나보낼 수 없었던 여자(최여진). 이젠 끝나버린 사랑은 차가운 총탄으로 변해 남자의 뒤통수를 파고든 뒤 아슬아슬하게 멈춰서 버렸고, 남자는 이내 피를 쏟으며 쓰러진다. 아직 살아는 있지만 삶이 너무도 고달팠던 남자는 죽음과 돈, 그리고 허무와 맞바꾸게 된다. 그렇게 잔디밭에 주저앉은 허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먼 이국땅에 내다 버린 어미(이혜영)에 대한 복수심으로 바뀌고, 남자는 그걸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신(神)의 장난이었을까. 조금씩 뒤통수를 파고드는 죽음으로 미련 없는 삶이 시작되자 남자에겐 복수와 함께 자줏빛으로 영롱한 사랑이 조금씩 다가왔다. 슬픔은 너울져 목구멍에 솟구치는 핏덩이처럼 괴롭히지만 남자는 소녀를 위해 한 번도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느새 소녀의 존재가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이유가 되자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한다. “하느님.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나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송·은·채. 내게 남은 시간 저 여자만 내 곁에 두신다면, 저 여자로 내 남은 시간을 위로해 준다면, 더 이상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냥 여기서 다 멈추겠습니다. 증오도, 분노도, 다 쓰레기통에 쳐넣고, 조용히 눈감겠습니다. 하느님. 나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소녀는 말한다. 나 같은 걸 좋아해 줘서 고맙지만 자신은 이미 가슴에 묻어둔 다른 사랑(정경호)이 있다고. 하지만 남자의 알 수 없는 눈물이 스펀지 같은 심장에 스며들 때 소녀 역시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을 예감한다.

오랜 짝사랑(정경호)이 심장이 좋지 않아 슬퍼하는 소녀. 그걸 뒤에서 바라보던 남자는 소녀의 아픔 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심장과 사랑을 맞바꿀 것을 제안하고 사랑에 지친 소녀는 그만 그의 곁에 주저앉아 버린다.

마침내 소녀의 오해는 슬픔으로 가득 찬 남자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지만 사랑은 이미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서져 가고 있었다. 남자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소녀. 가진 것 없이 외롭기만 한 이 남자를 지켜 주리라 다짐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허나 그걸로는 턱없이 모자랐기에 소녀는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 너저분한 지하철 계단에서 죽어서도 남자가 들을 수 있도록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를 붙잡고 울부짖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저씨.”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서 구원자와 같았던 소녀의 눈물과 사랑 탓이었을까. 여전히 자신을 몰라보는 어미를 향한 아들의 분노와 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가 끓여준 라면과 함께 소녀가 흘린 눈물로 변해 버린다. 그랬다. 엄마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었다. 아니, 자신을 잊지 못해 남의 아이(정경호)를 입양해 대신 키울 정도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해서 아들은 차마 쏟아지는 눈물에 한 젓갈만 하고 남긴 라면을 뒤로 한 채 현관문을 빠져 나온다. 그리곤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뒤 몰래 엄마에게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다짐한다. “다음 세상에서도 꼭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마침내 턱 밑까지 차오른 죽음, 남자는 마지막으로 소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이 세 마디만을 남긴 채 먼 곳으로 떠난다. “돌팅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남겨진 소녀의 어느 날. 자신을 위해 준비된 객석을 뒤로한 채 소녀는 남자가 묻힌 먼 이국땅 공동묘지에서 남자를 따라 조용히 눈을 감는다. 소녀가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아서도 지독하게 외로웠던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에 이번 한 번만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해 살겠습니다. 벌을 받겠습니다. 송·은·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2004년 12월 28일 종영. 16부작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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