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blackout)
블랙아웃(blackout)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2.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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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시절에는 가끔 형광등이 몇 번 껌뻑거리다가 꺼지곤 했다. 전기가 나가면 어머니는 구석에서 초를 찾아서 불을 켰다. 초는 전기의 비상용으로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전깃불은 장난감처럼 밥을 먹을 때도 우리 가족을 골려주곤 했다. 촛불을 켜서 두리반 상 위에 올리면 아버지의 긴 그림자는 구석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때는 가끔 전기가 끊겨도 불편함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변해서 전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무수한 선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앉아서도 먼 나라 뉴스를 볼 수 있으며, 정보를 공유하는 세상이 되었다. 전기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대신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지금도 자음 모음 자판을 두드리며 문장이 써지는 것은 전기의 힘이다. 전기는 문장을 만들고 밥을 만들고 세탁을 하고 집을 지키고 회사를 운영하고 사람을 끌어모은다.

지난 12월 6일 울산 도심에 1시간 50분의 정전이 가져 왔던 혼란들을 생각해본다. 암흑 속에 갇힌 이들은 엄청난 두려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은 이틀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에게 닥친 재난은 누구나 그 어떤 시간보다도 길게 다가온다.

우리는 전기와 함께 살아간다. 전기가 없는 세상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빛이 없는 곳은 가장 두려운 시간이다.

정전은 가정의 냉장고, 에어컨, TV를 멈추게 한다. 냉장고 속은 이제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보일러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잠을 잔다. 인터넷, 전화, 문자를 연결하는 무수한 선들은 아무 힘을 쓰지 못하고 멍청하게만 있다. 27층 고층에 사는 사람들은 걸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전기가 들어오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 기다려 보지만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이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며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

거리에는 자가용 천국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신호등이 없는 도로는 물고 물리는 사고로 이어지며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욱 리얼하다. 시간을 다투는 응급 수술은 1초의 지연으로 생과 사가 오고 가게 될 것이다. 수족관의 고기들은 숨을 쉴 수 없어 죽어간다. 승강기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에 떤다.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던 아이는 태블릿PC가 꺼지면서 멘붕이 온다. 학교에 간 아이는 돌아올 시간이 되었지만 아수라장이 된 도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히고 만다. 외부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인 휴대폰도 끊긴다. 대리기사는 손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매장의 계산대는 기능을 멈추고 물건들은 주인을 잃는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정원의 나무만이 이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변전소의 노후설비 교체공사로 전기가 끊긴 두 시간은 많은 혼란을 가져다줬다. 정전도 재난으로 변해갈 수 있지 않을까. 작은 두려움이 큰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 작은 혼란의 시간으로 우린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올 8월 브라질에서는 국가 정전 사태로 대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하철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열차에서 내려 선로를 따라 이동해야 했으며, 신호등 작동이 중단된 도로에서는 큰 혼란을 가져왔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태풍, 지진만이 재난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생각해보자. 최소한의 것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지. 일회용 절약하기, 용기 사용하기, 실내온도 낮추기, 가까운 곳 걸어 다니기 등등 한 사람씩만 함께 실천한다면, 작은 혼란이 큰 재난을 조금 늦출 수도 있지 않을까.

음악을 들으며 공원을 거닌다. 가로등이 내 긴 그림자를 끌고 간다. 나는 가로등에 의지하며 걸어간다. 가로등이 없는 거리는 두렵다. 정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한전의 전기관리도 중요하겠지만, 전기에 갇혀버린 우리의 생활 습관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우린 원하던 자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반문해 볼 일이다. 쓰지 않는 전기코드가 눈에 띈다. 코드를 뽑는다.

김뱅상 시인·현대중공업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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