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史料)로서의 근대기 신문기사
사료(史料)로서의 근대기 신문기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2.2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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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고대로부터 동해남부지역 최대의 소금 산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문헌의 기록도 많다.

그런 울산의 소금생산지에도 국운이 기울던 대한제국기에는 관리들의 과도한 세금 부과 횡포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관리들의 탐학에 저항할 힘이 없었던 염부(鹽夫)들을 가엽게 여겨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펼치던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선교사들은 법에도 없는 세금을 걷는 관리들의 횡포를 영국 공사에게 호소했고 공사는 대한제국 외부(外部)에 항의하며 염부들을 보호했다. 그래서 울산의 염부들이 보호막인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황성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황성신문은 1898년 창간돼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찬탈 된 1910년까지 발행됐던 신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불의함을 호소한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바로 이 신문에 실렸다. 박은식, 신채호 같은 쟁쟁한 애국지사들이 필진으로 참여해 애국적 논조로 일관했던 신문이었다.

울산역사연구소는 지난 20일 ‘신문기사로 본 일제강점기 울산’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근대기 신문기사의 사료적 가치를 점검하고 평가하기 위해 마련한 세미나였다.

이 세미나에서 이현호 우신고등학교 교사는 ‘근대신문으로 본 울산의 모습’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며 위의 황성신문 기사를 소개했다.

이현호 선생은 이 발표에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 전국에서 펼쳐진 국채보상운동에 울산사람들이 참여한 내용을 보도한 황성신문 기사도 소개했다. 기사에 따르면 울산 전지역에서 792명이 의연금을 희사했다. 이 가운데는 병영 서동에 사는 노과부도 포함됐다. 김복득이라는 이 여인은 논 9두락을 팔아 200원을 납부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인들도 일문(日文)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이 일문신문들에는 그들의 시각으로 본 당시의 사회상도 담겨 있다. 역시 참고할 내용이 많다.

그들은 그들의 영웅 가토 기요마사(加?淸正)의 전적지인 울산왜성을 각별히 여겼다. 세미나에서 동아대 하지영 교수는 ‘1910년대 부산일보를 통해 본 울산’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며 이런 내용을 설명했다. 부산일보는 일인들이 발행한 일문지였다.

1931년 교토제일고등여학교(京都第一高等女學校) 수학여행단이 울산왜성을 견학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도 울산지역 언론매체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세미나에서 전성현 동아대학교 교수는 ‘지역과 근대 세계를 보는 하나의 창, 일문신문’이라는 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주제처럼 조선에서 발행된 일문신문들도 당시를 들여다볼 하나의 창이라는 것이다.

일본 나가사키신문(長崎新聞)은 1890년 창간돼 지금도 건재하다. 나가사키현 인구는 126만명 정도이고 현청소재지인 나가사키시의 인구는 40만명 남짓이다.

나가사키 관련 문헌에 나오는 옛 사진들의 출처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 신문사가 제공한 것들이다. 또 이 신문의 기사가 인용된 논고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나가사키 관련 취재를 하며 ‘울산에도 오래된 지역신문이 있었다면’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신문기사의 신뢰성과 정확성에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하지만 사료로 삼을 만한 기사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울산역사연구소가 마련한 세미나가 그래서 의미가 크다.

강귀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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