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희의 감성수필] 고립을 꿈꾸다
[유서희의 감성수필] 고립을 꿈꾸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2.18 2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지치기를 한 감나무는 동면 중이다.

지인의 산방으로 들어서자 하늘이 마당까지 내려와 있다. 곳곳에 서 있던 감나무는 겨드랑이 밑까지 가지를 잘린 채 장승처럼 서 있다.

지난가을, 감을 달고 있는 감나무의 모습이 힘겨워 보이기도 했다. 기력이 떨어진 나무는 가지를 전정(剪定)해야만 새 가지를 내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감나무는 여느 나무보다 가지치기가 중요하다. 추위에 약하고 민감해서 잎이 완전히 진 후부터 가지치기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성격과 생각이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말마다 부정적인 사람, 거짓말도 진실처럼 속이는 사람, 지나치게 계산적인 사람 등 만남 자체가 힘든 사람과의 관계는 정리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초대장이 날아든다, 출판기념회, 공연, 행사 등 줄줄이 이어진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까지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올 때도 있다. 교류를 하지 않던 사람도 실속을 차릴 일이 있으면 안면을 가리지 않고 초대를 한다. 그럴 때면 황당해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하는 나를 탓한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앓았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착한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하는 증상이다. 속으로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표현을 못해 내면과 외면의 모순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반면 나에게는 홀대했다. 어떤 일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면 정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을 탓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후유증으로 한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겪은 후에야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품고 자랐다. 꼭 작가가 되어 이름을 남기겠노라 다짐했다.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모른 채 ‘글 잘 써서 돈 많이 벌어 줄게요’라며 엄마에게 큰소리를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반백을 넘긴 지금까지도 밑줄 그을만한 문장 하나도 쓰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원고를 쓰는 시간은 부러울 것 없이 고립을 즐긴다.

이 겨울, 나도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약속도, 모임도 삼간다. 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작품다운 글을 쓰기 위해선 칩거를 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한다. 외출을 자제하고 문장과 씨름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이다. 쫓기는 일상 속에서도 쉼표가 될 수 있는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하여 교과서 같은 말을 각인하며 칩거를 다짐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적막에 휩싸인 공간에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잠시 뒤, 침묵의 시간을 지나 사유의 늪으로 들어간다. 고립은 고독이 아니다. 홀로 노니는 즐거움이다.

산방을 나서며 동면 중인 감나무를 안아본다. 머지않아 굵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 바라며.

유서희 시인, 수필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