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만 있었던 여왕 이야기
신라에만 있었던 여왕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2.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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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와 인접한 곳에 살고 있어서 친구들과 경주 쪽 산에 가곤 했다. 왕릉같이 한적한 곳은 아내랑 가곤 하는데, 지난 가을에 찾은 선덕여왕릉과 진덕여왕릉은 두 곳 다 초행길이었다. 선덕여왕 능은 108m 높이의 보문동 낭산(狼山) 정상부에 있다. 서라벌의 진산이라는데, 겉보기에는 그냥 동네 야산이다. 봉분은 둘레 74m, 높이 6.8m에 남쪽 부분은 자연석으로 둘러놓은 순박한 모습이었다. 주인공인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으로 신라 27대 왕이다.

다시 경주 현곡면 오류리로 향했다. 28대 진덕여왕 능은 동북쪽으로 난 시골길을 가다가 산길을 조금 오르니 나타났다. 외진 곳이어서 찾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두 여왕은 종반(4촌) 사이인데, 죽어서는 이렇게도 멀리 떨어져 있구나 싶었다. 이곳은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서남쪽 방향과 반대편이어서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처럼 경주 왕릉은 주인이 불명확한 곳이 많다. 350여 년 뒤에 등극했던 진덕여왕 능은 아예 실체가 없고, 양산 어디라는 설만 있다.

사실 나의 관심은 왕릉보다는 세 분 여왕에게 있었다. 이 여왕들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영상을 중심으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신라는 김씨들이 왕위를 독점하면서부터 성골 출신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26대 진평왕 때는 성골 출신이 여성들밖에 없어서 공주가 왕에 오를 수 있었다. 진덕여왕 이후에는 남녀 모두 성골 출신이 없어서 김춘추가 진골 출신 최초로 29대 무열왕이 되었다.

진평왕 5녀 중 세 딸의 삶은 특별했다. 맏딸 덕만은 최초의 여왕이 되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차녀 천명은 25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하여 아들 김춘추를 두었다. 미모의 3녀 선화는 서동요 때문에 백제로 건너가 서동과 결혼한 후 왕비가 되었다. 서동이 무왕이 된 것이다. 무왕은 재위 41년(600-641) 동안 장인과 처형의 나라인 신라와 치열한 영토전쟁을 벌였다. 결국에는 660년에 이종사촌 사이인 신라 무열왕과 백제 의자왕이 국가 존망을 걸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

진평왕의 장기 재위(579-632)로 선덕여왕은 쉰이 넘어 등극했다. 여왕은 진흥왕과 진평왕 양 대에 걸친 기세를 이어가려 했으나 국내외 사정이 만만찮아서 나라를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직접 전장에 나서지 못하는 여왕은 불교의 힘에 의존했다. 20여 곳의 사찰 건립과 대규모 불사가 있었는데, 분황사, 황룡사 9층 목탑, 첨성대가 대표적 건물이다. 벽돌로 다듬어서 올린 아름다운 탑 형태의 분황사에서 사리함과 금바늘 같은 바느질 용구가 발굴되었다.

높이 80m의 황룡사 9층 목탑도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것으로 추정한다. 선덕여왕은 그 외 노숙자 점심 공양 미담과 여근곡의 예지력 일화도 있다. 여왕 즉위 무렵에 김춘추의 나이 서른, 김유신과 깊은 신뢰관계를 맺었다. 춘추와 유신의 여동생 사이에 난 아들이 후일에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이다. 여왕이 승하하던 647년 초에는 화백회의를 주도하던 상대등 비담이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28대 왕으로 즉위한 진덕여왕은 647년부터 7년간 재위했다. 왕의 교체 시기를 틈타 백제와 고구려가 침공하자 왕은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춘추는 나당동맹을 체결하여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았다. 왕은 당나라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한 김춘추와 비담의 반란을 극적으로 제압한 김유신을 깊이 신뢰하였다. 진덕여왕은 이처럼 명확한 국제정세 인식과 중앙집권적 관료체계를 완성하면서 삼국통일의 발판을 닦아나갔다.

진덕여왕이 654년에 죽자 김춘추가 29대 무열왕으로 등극했다. 이어서 김법민이 661년에 30대 문무대왕으로 등극하여 재위 20년 동안 당나라까지 몰아내고 통일대업을 이루었다. 진평왕 이후 맏딸이 선덕여왕, 질녀가 진덕여왕, 외손자 무열왕, 외증손이 문무대왕이 되었다. 3백년 세월이 흘러 신라 말기에 등극한 51대 진성여왕은 887년부터 10년간 재위했지만 기우는 국운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뼈에도 품격이 있다는 골품제도로 인해 신라에는 여왕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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