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海山의 얼기설기] 개와 오만원
[徐海山의 얼기설기] 개와 오만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1.2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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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

이 말은 영화(榮華)와 번성(繁盛)의 상징처럼 구전됐다. 개가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회자(膾炙)된 지역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굴비로 유명한 영광, 김 양식의 중심인 완도, 명태잡이 전초기지였던 속초 등이 대표적이다. 속초에는 만원짜리를 입에 물고 있는 개의 조형물과 벽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다. 주로 수산물의 생산 및 유통 거점이었던 어촌지역이다. 수확 때까지 시일이 걸리는 농산물에 비해 수산물은 즉시 현금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와 만원짜리’ 전설에서 울산의 장생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는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 포경을 금지하기 전까지 성황을 이뤘다. 20여척의 포경선과 인구 1만여명에 달했던 1970년대 후반 장생포는 돈도 사람도 넘치던 전성기였다. 그 당시, 길거리의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가 장생포 상황을 대변했다. 화려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듯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에도 만원을 물고 있는 개의 조형물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개와 만원짜리 전설은 산업의 중심이 변화하면서 어촌지역에서 탄광지역으로 옮겨갔다. 철암, 황지, 사북, 도계 등 석탄을 생산하던 강원도의 탄광촌의 개들이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석탄을 대신하여 석유와 가스가 에너지원으로 급속하게 대체되고, 석탄 합리화 정책으로 폐광이 속출하면서 탄광촌의 개와 만원 전성시대도 막을 내렸다.

탄광촌의 인구는 급감했고, 이미 오래전부터 지역소멸의 한가운데 놓였었다. 어촌에 이은 탄광촌, 이제는 그 자리를 공장촌이 차지했다. 울산과 함께 조선업의 양대 축인 거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조선소가 하나둘 들어서고 활황을 거듭하자 거제에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개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돌고 돌았다. 최근에는 반도체 생산공장이 입주한 화성 등의 지역이 개와 만원 전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구전의 임팩트(impact)는 예전만 못하다. 서울 등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지역이 소멸 위기를 피할 수 있는 길이 마땅치 않은 탓이다. 중앙과 지역 간 격차는 물론, 지역과 지역 간 격차도 통계와 지표상 수치보다 심리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더 크다.

나고 자란 마음의 텃밭인 경북 영주는 기업으로부터 5천억원을 유치했다고 동네방네 환영 플래카드를 대대적으로 내걸었다. 인구 10만명 붕괴 초읽기에 들어간 도시 입장에서는 대단한 성과라고 자축할 수밖에 없다. 샤힌 프로젝트 하나만으로도 9조원이 넘는 투자를 유치한 울산과는 애당초 비교 불가다. 인구와 산업인프라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울산이 안주할 상황은 아니다. 얼마 전, 부산상공회의소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인용한 자료를 발표했다. 지난해 전국 매출 1000대 기업 가운데 울산은 25개 기업이 47조 6천억원 매출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특·광역시 중 서울과 인천 다음으로 3위였지만, 전국 비중은 겨우 1.5%에 불과했다. 전국 1000대 기업 중에는 749개, 100대에선 90개사가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집중됐다. 안팎의 여건에 따라 생산기지는 언제든 이전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만원짜리가 만원 대접을 못 받는 시대다. 이제 오만원짜리 정도는 물고 다녀야 견공(犬公)들도 체면이 설 것이다. 비대해진 수도권에 비해 갈수록 쪼그라드는 전국의 각 지역에서 ‘개도 오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더라’라는 구전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나길 바란다.

徐海山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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