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通의 우리술 이야기] 백제를 닮고 싶은 술, 한산 소곡주 ②
[心通의 우리술 이야기] 백제를 닮고 싶은 술, 한산 소곡주 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1.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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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백제는 우수한 술맛을 자랑한다. “수수허리가 만든 술에/ 나는 취해버렸네/ 재난을 없애주는 술/ 웃음을 짓게 하는 술에/ 나는 취해버렸네/” 이 글은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번(仁番)이라는 백제인이 술을 빚어 진상하자 일본의 응신천왕이 그 술맛에 반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천황이 극찬할 정도이니 술맛이 궁금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교토에 있는 사가신사(佐牙神社)에 수수허리(일본어로 ‘스스코리’)가 ‘사케의 신’으로 모셔져 있는 것을 보면 백제의 술맛은 국제적이었던 것 같다. 일본 천황을 춤추게 한 술, 백제의 혼이 담긴 술이 어떤 맛일지 궁금해진다. 마음은 이미 1천500년 된 백제의 술을 맛보기 위해 한산으로 달려가고 있다.

일본의 응신천황이 인정한 술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술은 ‘한산 소곡주’이다. 그래서인지 한산 소곡주는 ‘1천500년의 역사를 가진 술’이라는 자랑이 따라다닌다. 한산 소곡주의 별칭이 ‘앉은뱅이술’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술맛이 좋다고 꽤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이 앉은뱅이술의 유래도 세 가지나 된다.

도둑이 창고에 들어가 소곡주를 맛보다가 취해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버전이 있고, 며느리가 술맛을 본다고 젓가락에 찍어 먹어보다가 취해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버전이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과거시험을 보려고 한양으로 가던 선비가 술맛에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과거를 망쳤다는 이야기이다. 도둑이나 며느리 이야기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으나 과거 보러 가던 선비 버전은 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팩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제도는 10C 중엽인 고려 광종 때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점이 인정되어 조선에도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인재를 뽑는 역할을 했던 과거제도도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숱한 비리와 편법으로 얼룩지게 된다.

과거는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나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양반계층만이 교육을 받고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를 보러 가는 것 자체가 양반의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양반인 이상 과거를 봐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탓에 정조 24년, 이틀에 걸쳐 치러진 과거시험의 응시자는 20만이 넘었고,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7만이 넘었다고 한다. 조선의 인구를 500만 정도로 보고 양반의 비율이 10% 정도라면 거의 한 집에 한 명 정도는 과거에 참여했던 셈이다.

그렇게 치른 과거는 빠르면 당일, 늦어도 2~3일 안에 합격자를 발표해야 하는데 누가 보더라도 7만여명의 답안지를 그 짧은 시간 안에 채점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정조실록(21년)>을 보면 과거 합격자 거의 모두가 먼저 낸 답안지 300장 안쪽의 응시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상이 이러하기에 답안지를 얼마나 빨리 제출하느냐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어디에 잡고 시험을 보느냐가 중요했다. 지금처럼 시험문제를 개인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장소에 게시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문제지를 빨리 볼 수 있고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곳이 명당이었지 싶다.

마지막 과거시험을 보았던 백범 김구 선생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팀을 꾸려 힘 있는 자를 앞세우고 자리 쟁탈전을 치르는 대혼잡의 광경이 참으로 볼만했다고 적은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남을 죽거나 다치게 하거나 압사당하는 일도 일어났다니 그 혼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박제가의 ‘북학의’).

과거 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는 가관이었다. 예상문제지와 참고서적을 들고 가는 것은 가소로울 정도였다. 거벽(巨擘=문장을 짓는 사람)과 사수(寫手=글씨를 쓰는 사람)를 데리고 가서 답안지를 작성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과장에서 직접 글을 쓴 사람은 1/10밖에 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온갖 비리와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급제하는 사람은 권문세가들의 자녀들이었다. 다산도 “합격자를 발표할 적에 보면 ‘시(豕)’자와 ‘해(亥)’자도 분별하지 못하는 젖내 나는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하기 일쑤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③으로 이어짐)

심규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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