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덕의 역사칼럼]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조선과 한국을 500년 고생시켰다 ⑦
[배종덕의 역사칼럼]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조선과 한국을 500년 고생시켰다 ⑦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1.2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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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덤’이란 말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지금은 ‘귀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코를 묻은 ‘코무덤’이다. 이 코무덤에 조선인 12만 6천명분의 코가 묻혀 있다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임진왜란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십만 명을 헤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일본에서 온 인신매매 상인들은 납치된 조선인 포로들을 목에 포승줄로 줄줄이 엮어서 개떼처럼 끌고 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먹을 양식이 모자라 오랫동안 거지 노릇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이렇게 끌려간 무수한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인 가정의 하인 신분이 되었다. 또 조선인 포로 상당수는 유럽과의 교역 창구였던 나가사키에서 노예 신분으로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갔다. 인도 고아와 이탈리아 밀라노도 그런 곳의 하나였다. 일본은 포르투갈의 노예상인들로부터 조총과 비단을 받고 조선인 포로들을 팔아넘겼다. 마카오, 마닐라, 인도, 라오스, 캄보디아에서는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고 전한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싼값에 팔린 조선인 노예가 하도 많다 보니 마카오에서는 국제 노예가격이 폭락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백자도 탐을 냈던 일본의 영주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조선 도공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도자기 기술자뿐만 아니라 밥그릇, 사발, 요강에다 개밥그릇까지 챙겨 가기도 했다. 끌려간 도공의 한 사람인 이삼평(李參平, ~1656)은 ‘아리타’라는 지방에서 백자 원료를 발견하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세계를 열었다.

이삼평이 지역 영주의 극진한 지원을 받아가며 빚은 ‘아리타 자기’는 조선 도공의 혼을 담아 만든 도자기였고, 이는 일본 도자기 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아리타 자기는 가까운 항구 이마리를 통해 유럽에 대량 수출되면서 ‘이마리야키’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했다.

서울에 주둔했던 왜군은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왕릉까지 도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광릉, 강릉, 태릉, 선릉, 정릉 등은 왜군들이 훼손한 왕릉이었다.

이와미 은광이 개발된 시기는 일본이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16세기는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기이자 상업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시기였다. 비록 지나(支那=중국)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일본은 동아시아 핵심 국가의 하나임이 분명했다.

사실 지나가 은본위(銀本位) 경제로 전환하는 명대(明代)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딱히 내놓을 만한 상품이 없어 아시아 무역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은이 아시아 무역의 기축통화가 되고 때마침 이와이 광산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지나와 조선의 선진상품을 수입하여 상업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유럽이 아시아 무역에 참여한 이후에는 이들이 지나와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담당하는 한 축이 되어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접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한마디로 은은 현재의 일본을 존재하게 만든 혈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⑧로 이어짐)

배종덕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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