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 드라마 ‘연인 파트2’
[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 드라마 ‘연인 파트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1.2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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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존주의를 논하다

‘실존주의(實存主義)’란 게 쉽게 설명하면 이런 거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때를 잠시 떠올려 보자. 비록 같이 놀고 있지만 각자의 마음은 다를 수 있는데 어떤 친구는 학업에 대한 미련으로 ‘내가 지금 이렇게 놀 때가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공부 안 하고 노는 것 자체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갖는 반면 다른 친구는 공부고 나발이고 지금 오로지 노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그 시간을 즐긴다. 어느 쪽이 됐든 누구나 갖고 있는 경험일 건데 결론을 말하자면 두 유형 중 후자가 바로 실존주의에 입각한 행동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헌데 여기서 진짜 중요한 건 전자의 친구가 왜 신나게 노는 데도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가이다. 공부야 다 놀고 난 뒤에 하면 되는데도 그의 마음속엔 지금 놀고 있는 자신 그 이상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공부를 잘하고 싶은 스스로의 욕망이 됐든, 아니면 ‘학생은 학업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부모나 선생님의 가르침이든, 혹은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을 테다. 아무튼 후자의 학생이 ‘그래도(놀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전자의 학생은 ‘그래야(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실존주의는 이처럼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도 ‘나’지만 신나게 노는 것도 역시나 ‘나’라는 현실을 긍정하자는 것. 이를 세계관으로 확대하면 현실 그 이상의 세계, 가령 행복으로 가득 찬 영원불멸의 천국이나 극락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변화의 세계인 이 대지 위에서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고통이 존재하니 그렇지 않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면서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는 이 세계의 생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이곳에서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바로 천국이나 극락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한참 놀 나이라서 노는 데도 괜히 죄책감을 가질 게 아니라 놀 때는 놀고, 그래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놀았던 만큼 밤샘 공부를 해서 보충하는 것, 그게 바로 실존주의의 삶이다. 그리고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니체는 이런 사람을 위버멘쉬(Ubermensch), 즉 ‘초인(超人)’이라 불렀다. 고통이 엄습했을 때 ‘나한테 왜?’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걸 긍정하면서 극복해 나가는 사람.

그러거나 말거나 감히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학생이 본분을 잃고 아무 생각 없이 논다면 본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에겐 당연히 ‘잡놈’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얼마 전 파트2까지 종영된 드라마 <연인>에서 이장현(남궁민)이 스스로를 잡놈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다들 공감하겠지만 극중에서 묘사되는 장현의 진짜 적(敵)은 ‘조선’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의 명분이었던 것. 명분이란 게 그렇다. 그건 ‘그래야 한다’며 자주 현실을 부정하려 든다. 그랬기 때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청으로 끌려가 오랑캐들에게 욕을 본 뒤 다시 돌아온 여인들을 향해 조선은 자결을 강요했던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인 정절(貞節)에 어긋난다며.

하지만 장현은 그 반대였다. 억울하게 청으로 끌려가 욕을 본 연인 길채(안은진)에게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또 마지막회에선 과거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는 과정에서 장씨에서 이씨로 성(姓)을 바꾼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교가 지배하는) 이씨 조선에서 잡놈으로 한번 살아보려고.” 그랬다. 로맨티스트 장현은 실존주의자이기도 했다. 아니, 니체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라 말했던 ‘초인(超人)’의 표본이라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힘에의 의지’(힘에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우주만물이 흘러가는 힘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를 주창했던 니체의 말대로 조선이 오랑캐라 경멸할 때 그는 일찍이 강성해져 가는 청(淸)을 인정했고,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냈다. 그리고 청에 볼모로 잡혀 온 소현세자(김무준)에게도 “(명분 따윈 잊고) 담대하게 살아내십시오”라고 간언했다. 무엇보다 ‘조선제일검’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극강의 검술(劍術) 실력까지. 남자인 나도 반하겠더라. 해서 그가 검을 뽑아 들 때마다 무협영화를 가장한 실존주의 멜로영화 <동사서독>이 떠올랐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검을 손에 쥔 구양봉(장국영)은 적들을 향해 퇴폐미 가득한 미소를 내뿜으며 이렇게 말한다. “지나치게 강한 질투심은 사람을 바꿔놓기도 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이 나보다 즐거운 게 싫다.” 참,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에 솔직한 것도 실존주의다.

해서 드라마란 게 남자들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 같다. 실존주의 관점에서 이장현 같은 남자, 현실엔 없다. 아니, 이청아(극중 청나라 각화 공주)가 자자는데 그걸 마다해? 연인 길채는 이미 시집까지 간 마당에. 참나. 기회는 찬스인데. 영화였으면 백퍼(분명) 잤다. 이래서 드라마는 안돼.

2023년 11월 18일 파트2 종영. 총 21부작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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