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되어야 할 가야사(伽倻史)
복원되어야 할 가야사(伽倻史)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1.1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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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는 나를 가야국 산책길로 인도했다. 실제로 아라가야 본거지인 함안 말이산 고분에도 다녀왔다. ‘가야 흥망사’ 글에 대해 몇 가지 지적이 있었다. 가야사는 최대 520년이며, 가야권 국가들의 명칭을 일본서기에서 따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야국 건국 시기와 변한지역 성읍 국가들 명칭에 대해 지적을 받은 것이다. 가락 후인이 집필한 <사국시대 가야>와 <가야국 산책>을 보내주어서 가야국을 두루 살펴보는 데 도움이 컸다.

방송에서 조명한 가야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성동 고분, 가야인은 어디서 왔나’, ‘제4의 왕국, 국제무역항 가야’, ‘가야 흥망의 블랙박스, 철갑옷’, ‘황금 칼의 왕국, 제7가야 다라국’, ‘한국의 폼페이, 아라가야’, ‘가야인은 성형 수술을 했다’, ‘제4제국 금관가야 고분’, ‘대가야 마지막 왕자 월광은 어디로 갔나’, ’가야에 여전사가 있었다‘ 등이 그것이다. 수많은 가야 이야기를 영상으로 복원시킨 KBS 역사스페셜을 다시보기 하면서 내용을 두루 살펴보았다.

BC 4세기부터 한(韓)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들이 많이 세워졌다. 부여 3국, 옥저, 동예, 고구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조선 강역의 한민족들은 이런 나라들 외에도 더 많이 분화되었다. 부여를 비롯한 이들 나라는 모두 AD 494년을 끝으로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심한 지역의 백제, 신라, 가야 등 3개국과 더불어 가야 최후 멸망 AD 562년까지 520년간 4국이 존재했고, 그 후 백제가 멸망하던 AD 660년까지 98년간 3국이 존재했으니 통상 ‘삼국시대’라기보다 ‘사국시대’여야 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백제를 세운 온조는 부여인이었다. 가야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밝히는 역사스페셜에서도 가야의 지도 계층을 북방 기마민족으로 추정했다. 가야 고분군에서 나온 기마인물 토기와 철갑옷, 투구, 마갑(馬甲)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더군다나 중국 선양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인근 고분 출토 유골을 부여인의 것으로 보는데, 이는 김해 대성동 고분 출토 유골과 매우 유사하여 가야 지배층도 부여인으로 추정하였다.

가야 유물 중 중요한 문화재가 많다. 국보는 ‘전 고령 금관과 장신구 일괄(국보 제138호)’,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국보 제275호)’ 등 두 가지다. 보물급은 무척 많은데, 2개의 금동관(복천동, 대가야), 4자루의 용봉환두대도(합천 옥전고분), 청동칠두령방울(부산 복천동), 마갑 외에는 거의 다 토기들이다. 높은 기술 수준과 조형미를 갖춘 가야 토기는 곡선 굽다리 접시와 다양한 그릇받침이 다수다. 사자(死者)를 위한 토기로는 집 모양, 배 모양, 수레바퀴 모양, 등잔 모양 등이 있다.

이처럼 가야는 제철기술과 더불어 토기기술이 뛰어났다. 이외 다량의 덩이쇠(鐵鋌)와 비늘 철갑옷을 비롯한 각종 무구(武具)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함안 말이산 고분 덮개돌 아래에 134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 성혈석(星穴石)이나 고령 고아리 벽화 고분은 죽어서도 생전 세상이 이어진다는 계세(系世)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무단 도굴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출토품들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산책 과정에서 고대국가들의 건국 시기에 관심이 갔다. ‘삼국사기’에 신라가 BC 57년, 고구려가 BC 37년, 백제가 BC 18년 순인데, 과연 그럴까. ‘가락국기’에 가야국들의 건국 시기를 AD 42년이라 했는데, 정말 신라 건국보다 99년이나 늦었을까. 더구나 가락국이 철을 매개로 활발한 무역활동을 한 것은 신라보다 가야의 철기시대가 먼저 도래했음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이런 몇 가지로 미루어 우리 역사서는 가야사의 기술(記述)을 너무 축소시켰고, 소외시킨 것이다.

가야사 복원의 전제는 ‘임나일본부설’의 폐기를 거듭 확인하는 일이다. 720년에 발간한 <일본서기>는 가야사를 아전인수 격으로 기록했다. 그들은 또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가야사를 왜곡했다. 비석의 글자를 훼손하고 오역하여 4세기부터 2백여 년간 가야를 지배했다는 기록이라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사(征服史)를 기록한 비석인데,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이다. 임나(任那)는 실제로 후쿠오카 또는 쓰시마 설이 유력한데 말이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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