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일' 사랑, 기억 때문에 구질구질해지는
영화 '30일' 사랑, 기억 때문에 구질구질해지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1.0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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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1994년작 <동사서독>에서 오랜만에 사막을 건너 오랜 친구인 구양봉(장국영)을 찾아 온 황약사(양가휘)가 술에 잔뜩 취해 말한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술 한 병을 주었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醉生夢死)’야.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군. 난 그런 술이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어.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란 말도 하더군.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매일이 새로울 거라 했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권태(지루함)는 기억을 먹고 산다. 기억이 쌓이면서 권태도 늘어간다. 익숙해진다는 건 기억을 하기 때문이고, 술에 취한 황약사의 말처럼 기억을 잃으면 분명 새로워진다. 내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된다면 난 갓 태어난 아이로 돌아가게 된다. 아이가 그렇듯,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해 어린 시절의 나처럼 다시 크리스마스만 다가와도 마냥 행복해하지 않을까.

그런데 황약사가 취생몽사를 원했던 건 짝사랑의 아픔 때문이었다. 바로 친구 구양봉이 사랑하는 여인인 자애인(장만옥) 때문이었던 것. 자애인도 구양봉을 사랑했지만 천하(天下)를 얻기 위해 그가 강호로 떠나면서 홧김에 그녀는 구양봉의 친형과 결혼해 버렸다. 그런 자애인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황약사는 해마다 복사꽃이 필 때면 구양봉을 먼저 만난 뒤 아닌 척 그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자애인을 만나러 갔다. 보고 싶어서. 그리고 취생몽사에 대한 이야기는 자애인이 황약사에게 건넨 농담이었다. 둘 다 각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힘이 드는 만큼 그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잃고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에 존재하지도 않는 취생몽사를 찾았던 것이다.

헌데 영화 <30일>은 그런 취생몽사가 기억상실증을 통해 한때 깊이 사랑했던 남녀 사이에서 실현된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작품이다. 그랬다. 이른바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시종일관 가볍게 웃어 재끼면서도 난 마음 한켠에서 오래전에 봤고, 지금도 생각날 때 보곤 하는 왕가위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 <동사서독>을 떠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억이 쌓이면서 구질구질해져 버린 사랑이 취생몽사를 마신 뒤에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거든. 비단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쉽게 치부하진 마시길. 너무 오래돼 그 마음의 탄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린 당신의 사랑도 당장 기억을 잃어버리면 새로워지니까. 아니, 막말로 기억을 다 잃어 상대방이 처음 본 사람이 되는데 안 좋겠어요? 바로 침대로 가겠지. 후후.

<30일>에서 정렬(강하늘)과 나라(정소민)도 그랬는데 서로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지만 결혼 후 둘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홧김에 상대방을 향해 한 번씩 던진 야구공에 의해 뚫린 벽에 걸린 커다란 결혼사진은 망가져 버린 그들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준다. 환장할 노릇인 건 그 야구공은 정렬이 나라에게 처음 사랑 고백을 할 때 큐피드의 화살로 쓰였다는 것. 하지만 지금 그 화살은 독화살로 변해 서로를 향하고 있었던 거다.

결국 더이상 이렇게 살 순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둘은 합의 이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법원의 이혼 승인이 떨어진 그날, 법원을 빠져나온 뒤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거짓말처럼 교통사고를 당해 나란히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린다. 더 골때리는 건 기억을 빨리 찾기 위해선 같은 공간에서 서로 부대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 이미 양가 부모들까지 둘의 이혼에 열혈 찬성한 터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기억을 찾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남남 아닌 남남으로 다시 같이 살게 된다. 이혼 숙려기간인 30일이 다 지나갈 때까지. 다만 혹시나 생길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정렬의 처제(황세인)도 같이 살면서 둘 사이에 사랑의 스파크(불꽃)가 튀지 못하도록 방패막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랬다. 기억을 모두 잃은 정렬은 다시 나라에게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잘해준다. 결혼 전에 처음 나라를 꼬실 때처럼. 그건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결혼 전, 정렬의 마음을 받아들여 사귀게 됐던 그 과정을 똑같이 반복한다. 그렇다면 만약 둘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가슴이 뛸까? 아님 예전처럼 다시 서로를 향해 야구공을 던질까? 아니, 그보다 사랑이란 놈, 참 간사하지 않아요? 내가 만약 정렬이라면 기억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탈해서 한참 동안 웃을 거 같은데. 하긴, 우주만물이 변하는데 고작 지구라는 작은 행성의 지표면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사랑 따위가 어찌 안 변할까.

사실 <동사서독>의 영어 제목도 ‘Ashes of Time(시간의 재)’이다. 시간은 거대한 화염이고 그것은 흐르지 않고 매 순간 타들어 간다. 그렇게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땔감을 태워 그것을 재(灰)로 만들어 버리고, 그 재에 파묻힌 기억은 제아무리 사랑의 것이라 해도 권태로 푸석푸석하게 부서져 내리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일찍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다만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2023년 10월 3일 개봉. 러닝타임 119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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