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흥망사(興亡史)
가야 흥망사(興亡史)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0.2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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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伽倻史)는 우리 사서에 기록이 없다. 다만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편>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사와 중국의 <위지동이전>을 참고하여 가야사의 얼개가 짜였다. 옛 변한 땅에는 다행히 대규모의 ‘가야 고분군’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먼 옛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7곳의 고분군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그중 일부는 이미 발굴 작업이 진행되어 가야사를 대변하고 있다.

변한지역의 소국들은 원래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도 그랬지만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되어 가자 사로국을 중심으로 신라가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고, 변한 소국들은 구야국(가락국)을 중심으로 가야연맹체가 형성되었다. 이 ‘전기 가야연맹체’는 김수로가 시조인 금관가야가 맹주였다. 김수로왕 탄생설화는 구지봉에서 6개의 황금알 중 가장 먼저 알을 깨고 나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6가야 설이 나왔는데, 실제로는 6가야 외 15개 이상의 가야 소국들이 존재했다.

한반도의 철기시대는 일찍이 삼한까지 도래했다. 고대 철의 이동 경로가 삼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변한, 즉 가야권역 국가들은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갖고 있었다. 당시 가야국들은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발전했는데, 그 중심 품목에 철(鐵, iron)이 있었다. 특히 일본은 그 무렵, 제철 기술이 없어서 가야의 철에 목을 매던 때였다. 이처럼 가야의 철이 해외로 수출되었으니 철 연금술은 김수로가 석탈해를 앞섰을 것이라 짐작한다.

기원 전후에 건국되었던 금관가야는 4세기 말에 위기를 맞았다. 백제가 구야국의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였고, 신라가 가야국들의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에 도전하였다. 고구려에 밀리던 백제는 금관가야랑 왜국과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였지만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 덕분에 구원되었다. 이어서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금관가야는 명맥만 유지한 채 대가야에게 맹주 지위를 넘겨주게 된다.

5세기부터는 반파국인 대가야(고령)가 크게 성장했다. 구야국 망명객들을 수용하고 급속히 세력을 키우면서 소위 ‘후기 가야연맹체’를 형성했다. 금관가야가 양산의 물금철광을 개발하여 제철산업을 선도했다면 대가야는 가야산 야로철광에서 철을 생산함으로써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남부 가야권의 안라국인 아라가야(함안)가 연맹체 역할을 분담하였다. 대가야는 낙동강 내륙이 근거지로, 안라국인 아라가야는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양대 축을 형성한 것이다.

후기 가야연맹은 494년, 낙동강 유역의 땅 22개국을 최초로 장악하였다. 남원과 임실, 장수, 곡성, 순천 등 섬진강 유역도 흡수하여 새로운 교역 기반을 조성하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가야는 철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주도했으며, 중국 강남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국제사회에 이름을 떨쳤다. 합천지방에서 산출된 철과 옥은 고구려로 수출되었고, 고구려는 다시 옥을 북위와의 교역에서 중요 결제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대가야의 위세는 대단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512년에 백제 무령왕에게 섬진강 지역을 빼앗겼다. 신라는 529년에 탁기탄(밀양)을 점령하였고,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 554년, 신라 진흥왕은 백제·가야 연합군을 관산성(옥천)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는 여세를 몰아 소가야(고성)와 사물국(사천)을 점령하였고, 555년에는 비지국 비화가야(창녕)를 접수하였다. 561년에는 아라가야를, 562년에는 마지막으로 대가야를 복속시키면서 가야 정복에 마침표를 찍었다.

가야는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신라 3대 왕들(지증·법흥·진흥)에 의해 멸망했다. 가야연맹체 소국들은 서로 대등한 힘을 가졌기에 중앙집권국가에 이르지 못하여 신라에 졌다. 그러했음에도 가야는 연맹체만으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더불어 550년 동안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 KBS는 과거에 ‘역사스페셜’을 통해 고분 속에 묻힌 가야사를 영상으로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이제 사학계는 1천5백년 동안 괄호 밖에 있던 가야사를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해야 한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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