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보드레한(달달한) 우리말이 좋다
달보드레한(달달한) 우리말이 좋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0.0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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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민충환-온 즈믄 골 잘

어제가 제577돌 한글날이었다. 우리말에 관한 이야기 하나쯤은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쉽게 말하지만 실상 지켜내는 일에는 그리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어 종종 마음이 불편하다.

다행히 앞선 이들이 남긴 빛나는 우리말 연구자들이 많아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공부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그중 한 분, 민충환 선생이 쓴 ‘온 즈믄 골 잘’은 여러 우리말 관련 책과 함께 곁에 두고 가까이하고 있다.

‘백(百)·천(千)·만(萬)·억(億)’을 순 우리 말로 하면 ‘온·즈믄·골·잘’이 된다. 여기 실린 글들은 국립국어연구원 및 여러 지면에 발표됐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특히 선생은 백초 홍명희를 비롯 이태준, 박완서, 송기숙, 권정생, 한승원, 정채봉, 이문구, 윤흥길, 황석영 작가 등 작품에 나타난 아름다운 우리말을 골라내는 일에 앞장섰다.

명성을 얻은 작가들이 남긴 작품은 구성 밀도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그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언어가 있어서 가능했다.

사람을 압도하는 좋은 글이란 시대 변천에 상관없이 우리말을 더 갈고 닦아 쓰임새를 확장 시켜나가는 게 맞다.

특히 민 선생은 이태준 연구에서 괄목상대(刮目相對)할만한 성과를 남겼다.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대놓고 언급조차 하기 힘들었던 시기, 반공 이데올로기를 헤쳐나가며 행적을 수소문하며 글들을 챙겨 첫 연구서 ‘이태준 연구(1988년 4월)’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는 그해 7월에 발표됐다. 이후 ‘상허 학회’가 만들어졌고 벽초 홍명희 ‘임꺽정’에 관한 우리말 용례 사전도 만들게 됐다. 그가 집중해서 한 일은 ‘문학 연구는 아니라도 작품을 읽는데 어려움이 따라오는 어휘를 풀이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문구 소설어 사전’, ‘송기숙 소설어 사전’, ‘박완서 소설어 사전’ 등이 민 선생 손을 거쳐 줄줄이 나왔다. 민 작가 책은 아니지만 2018년 8월에는 김성동 작가가 ‘국수’(國手)라는 장편소설에 이어 이 책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조선말을 소개하는 부록 격인 ‘국수 사전’(國手 事典)을 펴낸 바 있다. 왜 이러한 사전(事典)이 필요했을까?

 

김 작가는 이 사전이 필요했던 까닭을 말한다. ‘말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그 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민족문화가 올바르게 설 수 없고, 민족문화가 올바르게 서지 못하는 만큼 참된 뜻에서 민족 얼 또는 민족 삶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문을 돌려 민 작가가 쓴 ‘박완서가 쓴 우리말’에 관한 문장을 살펴보자.

‘그녀는 종상이가 동해랑집을 처가로서가 아니라 이성이를 마땅찮아하는 감정으로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각죽거렸다.’ <미망, 하(下)권 중에서> 여기서 ‘각죽거리다’는 남의 비위를 건드려 불편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하나 더 읽어보자.

‘누가 못할 줄 알구. 이 구질구질한 구더기 밑 샅 같은 성공에 흙칠, 아니 똥칠인들 못 할 줄 알구.’ <‘휘청거리는 오후’ 중에서> ‘구더기 밑 샅 같다’는 아주 누추하고 상스럽고 구질구질한 모습을 이름이다.

이문구 소설도 그 재미를 온전히 느끼려면 찰진 충청도 사투리를 제대로 알아야 글맛이 살아난다. 이런 면에서 남덕현 작가가 쓴 ‘충청도의 힘’도 이에 못지않다.

문법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語彙)를 제대로 알고 쓰면 더 아름다운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울산 출신으로 평생을 우리 말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실천성이 포함된 학문을 최고로 여긴 국어학자이자 사회사상가이셨다. 그를 대표하는 한 마디, ‘한글이 목숨’이라는 붓글씨. 1932년부터 1936년까지 5년 동안 서울 어느 음식점 주인이 받은 80쪽짜리 방명록에서 발견됐다. 제목이 금서집(錦書集). ‘비단처럼 아름다운 글을 모은 책’이라는 뜻이다.

선생 단골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로선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한글이 용납되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지금은 어떤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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