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도에 핀 가족사랑
매물도에 핀 가족사랑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10.0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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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작년 설 명절부터 모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온 가족이 모여 벌초하러 가니까, 산소에서 간단하게 조상님께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고 하셨다. 아마도 자손들에게 제사로 인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당신의 깊은 배려심이 그런 결단을 내리게 한 것 같다.

작년 추석에 이어 올해도 시댁 가족 모두 모여 매물도로 여행을 갔다. 거제 대포항에서 배로 30여 분쯤 쪽빛 바다를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의 바다 풍경은 동해와는 사뭇 달랐다. 멀리 보이는 크고 작은 섬들은 탄성을 자아낼 만했다.

짐을 풀고 동서들과 그동안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달맞이꽃이 꽃등을 켤 시간쯤, “와! 노을이 너무 예쁘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동을 잡고 돌아온 조카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잽싸게 일어나 저녁놀을 보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과연 매물도의 붉은 놀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꽃노을에 취해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낚시하러 갔던 막내 서방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아이스박스를 내려놓았다. 그 속에는 무늬오징어 3마리와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듯한 줄돔 6마리가 방금 떠나온 바다를 그리워하는 듯 파닥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저마다 일제히 동공이 커지며 우와! 하고 감탄사를 쏟아냈다.

가족들에게 맛있는 회를 떠주기 위해 부족함 없이 준비해온 시동생은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횟감을 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안에서 저절로 자꾸 생기는 군침을 삼켜가며 젓가락을 들고 오종종히 둘러앉아서 기다렸다.

드디어 귀한 회를 맛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고, 우리는 먼 바다로 나가서 낚시하느라 애쓴 시동생에게 큰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상추에 회를 올려서 쌈을 싸서 먹으니 쫄깃쫄깃함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었다.

마당에서 2차로 돼지고기 바비큐와 둘째 동서가 준비해온 맛있는 반찬을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는 사이에, 보름달이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는 저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에 품고 있던 소원 하나씩을 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매물도에 정착해서 살던 사람들의 아픔이 어린 꼬돌개길을 걸었다. 정착민들의 힘겨웠던 삶은, 어쩌면 고된 시집살이와 가난한 살림에 삼형제 공부시키느라 고달팠던 시어머님의 삶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풋서릿길이 많아 이슬이 신발을 축축하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군봉을 향해 쉼 없이 걸었다. 조카들에게 길가에 핀 사위질빵꽃과 칡꽃을 알려주니 신기해했다. 검색하지 않고 바로 야생화의 꽃 이름을 누군가에게 알려줄 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질 때도 있다.

장군봉에 도착해서 전망대에 서니 갯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어머님은 콧노래를 부르시면서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맏며느리로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나에게 늘 따스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어머님. 동서들과 오랜 세월 구순하게 잘 지내온 것도 당신의 역할이 컸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내년 추석엔 어디로 여행 갈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졌다. 며느리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어머님의 지혜로운 선택 덕분에 소중한 추억을 저마다의 가슴에 담고서.

<뜻풀이> △풋서릿길= 잡초가 무성하게 많은 길 △구순하다= 사이가 좋아 화목하다 △꽃노을= 고운 색깔로 붉게 물든 노을.

천애란 사단법인 색동회 울산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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