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잠’ 부부라는 ‘꿈’, 남녀라는 ‘현실’
영화 ‘잠’ 부부라는 ‘꿈’, 남녀라는 ‘현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9.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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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서 부부(夫婦)가 된다는 게 그렇다. 식장에서 주례 선생님은 “이제 두 사람은 하나가 됐다”고 말하지만 그건 어림없는 소리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종족에서 볼 수 있는 ‘아칸(하이 템플러+하이 템플러)’이나 ‘다크 아칸(다크 템플러+다크 템플러)’처럼 두 인격이 합쳐져 하나의 인격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 그렇다. 아무리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려도 합체로봇처럼 두 개의 인격이 하나로 되진 않는다. 그리고 부부가 된 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여전히 ‘부부는 하나’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부부가 되면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는 만큼 뭐 그럴만 하다.

하지만 하나의 가족에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왜냐.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중력(重力)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 결혼 전 혼자일 때 편히 쉬고 싶을 땐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침대에 누워버리면 끝이다. 허나 부부가 됐을 땐 상대방의 중력장(重力場:중력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을 견디거나 느끼면서 누워야 한다. 쉽게 말해 눈치를 봐야 한다. 부부관계란 게 늘 좋을 순 없으니까. 참, 중력장이 발생하면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라 시공간은 휘어진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땐 시간이 빨리 가지만 싫은 사람과는 느리게 가는 이유다. 아무튼 연애할 땐 미친듯이 인력(引力:끌어당기는 힘)만 존재했던 두 개의 중력은 그렇게 부부가 되어 계속 같은 공간에 위치하게 되면 가끔 척력(斥力:밀어내는 힘)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허나 척력이 발생할 때도 서로를 사랑스럽게 대해야 한다. 부부니까. 하나니까. 맞다. 어쩌면 부부가 되어 가장 힘든 건 인력만 작용했던 연애 시절보다는 분명 덜 행복한데도 더 행복한 척 해야 하는 게 아닐는지.

해서 거장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영화 <잠>에서 거실에 떡하니 내걸린 가훈은 오히려 무섭기까지 하다. 거기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 그렇다.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은 이제 막 결혼해 단꿈에 젖어 있는 신혼부부다.

헌데 둘만의 가훈은 전제가 이미 틀렸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혼자있고 싶을 때가 제법 많다는 것. 그러니까 상대방의 중력을 피해 둘이 함께 하고 싶지 않거나 함께 하면 안 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떨어지는 가훈이다.

실제로 유재선 감독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바로 남편인 현수의 몽유병이 그것. 신혼집을 차리고 얼마 뒤 다정하기만 한 현수는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는 미친 사람처럼 생선과 고기를 날것으로 먹었다. 또 어떨 땐 창밖으로 뛰어 내리려 하고, 키우던 강아지까지 죽이려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몽유병에 걸린 것이다.

겁에 질린 아내 수진은 남편의 병을 고치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그 와중에 아기까지 태어나면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밤마다 불안에 떨며 남편을 지켜보다 불면증까지 걸리면서 그녀의 신경은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보다 못한 남편 현수는 병이 나을 때까지 떨어져 지내자고 하지만 그때마다 수진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을 들먹이며 버틴다. 그 즈음, 신혼부부집 바로 아래 층에 살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던 민정(김국희)이 담배를 피우러 나온 수진과 맞담배를 피우며 이렇게 말한다. “힘들죠? 근데 결혼이 뭐 별 건가. 답이 없다 싶으면 때려치우면 돼요.”

그렇다. 이 지점부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현수와 수진의 가훈은 이제 감독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는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신경쇠약 속에서 덩달아 수진까지 점점 미쳐가는데 그 속에서도 가훈만은 반짝반짝 빛을 냈고, 그런 풍경을 통해 감독은 결국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래도 둘이 함께 하는 게 맞을까요?”

사실 현수는 배우다. 완전 잘 나가는 배우는 아니지만 나름 촉망받는 배우였고, 그 때문에 수진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스럽게 대하긴 하지만 연애할 때와는 조금 달라진 그의 모습에 가끔 투정을 부린다. 가령 밖에서 남편이 보게 되는 어리고 예쁜 여배우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어쩌면 수진이 그 지경 속에서도 가훈을 계속 붙들고 있었던 건 그 이유때문이 아니었을까. 뭐, 솔직한 말로 잠자리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겠지. 연애할 땐 눈이 벌개서 덤비던 놈이 말이지. 후후. 허나 그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물을 아무리 뜨겁게 끓여봐라. 안 식나. 이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열역학 제2법칙’ 때문이겠지만 물은 식어도 물이다. 식어도 사랑이라는 이야기.

비록 연애할 때와는 달리 그 사랑의 탄력이 많이 떨어져 이젠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었어도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이 도시가 우리를 투박하게 감싸고 있듯 식어버린 당신의 사랑도 여전히 당신을 안아주고 있지 않을까.

부부이기 전에 남녀고, 결국은 어쩔 수 없는 같은 인간이다. 그나저나 우째 이리 잘 아냐구요? 참나, 왕년에 누가 결혼생활 안 해봤나. 으이그.

2023년 9월 6일 개봉. 러닝타임 94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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