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인생은 고갯길’임을 이제 알겠네
-284- ‘인생은 고갯길’임을 이제 알겠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9.1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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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도시와 시골 전원생활을 번갈아 즐기며 사는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은퇴하고 듀얼 라이프로 사는 것이 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시골이 아닌 서울과 울산을 오가는 ‘서울총각’이 되었다. 숙소에서 사무실까지는 도보로 10분이면 충분하다. 강남 개발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아직도 강남 곳곳에 고갯길이 있다. 그중 논현동 고개가 제일 가파르다. 논현동 고갯길이 출퇴근길이다. 숙소는 오르막 꼭대기의 골목길에 있고, 사무실은 고갯길 아래 학동역을 지나 서울세관 뒤편에 있다. 출근길은 내리막이라 편하지만, 퇴근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라 숨이 차다.

1997년 관세청이 대전으로 옮기기 전에는 서울세관과 관세청은 현재의 서울세관 건물에 함께 있었다. 출퇴근 시 지나치는 곳이 태어나 처음 방문한 세관이자 공직생활의 터전을 닦았던 옛 관세청 건물이다. 내 인생의 30~40대 청춘을 다 바친 곳에서 함께한 후배들을 지나치며 보기도 하고 업무를 보면서 마주치기도 한다. 은퇴하고 다시 20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돌아오니,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 같은 기분이다. 1981년 여름방학 때 서울세관에서 실습할 기회가 있었다. 주변에는 큰 건물이 없었고 관세청 건물만 우뚝 서 있었다. 인생의 동반자이며 보금자리에 대한 우쭐함과 위안으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불렀다.

부산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선배님들은 일찍 서울로 올라간 분들을 부러워하는 것을 옆에서 보곤 했다. 같은 평형의 아파트가 서울과 지방의 가격이 두세 배 차이가 나고, 자녀가 대학을 서울에서 다니면 교육비로 월급의 반 이상이 들어간다 했다. 근무를 서울에서 했더라면 하숙비도 아낄 수 있었다는 신세타령이었다. 89년 초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성남에 신혼집을 구하고 안양 등을 전세로 전전긍긍하다 세월이 흘러 집을 마련하는 등 안정을 찾을 무렵, 정부 3청사 이전계획에 따라 관세청이 대전으로 이전했다. 서울 집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이사하여 20여 년의 시간을 지방에서 보낸 셈이다. 울산세관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정리하고, 제2의 인생은 울산에서 출발했다.

돌고 돌아온 서울 생활은 여러 면에서 적응이 힘들었다. 전철과 버스도 제법 익숙하여 주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모임 문화에도 적응이 되고 있다.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어색했다. 저녁 약속은 만나더라도 함께할 시간이 짧다. 지방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 생맥주도 한잔하고 헤어지지만, 서울서는 주로 커피숍에서 정리하고 각자 지하철로 집으로 돌아간다. 언주역이든 학동역이든 역에서 귀갓길은 오르막이다. 고갯길을 올라오며 하루의 생활을 정리한다. 논현동 고갯길이 인생길이 되었다.

돌아보니, 누구나 그렇듯 내 인생에도 굴곡이 많았다. 논현동 고갯길을 걸어 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지난 시절을 되새기며 인생을 돌아볼 수 있어 좋다. 많은 기억이 주마간산처럼 스쳐 간다. 밤새도록 악을 쓰며 옳고 그름을 다투던 식당. 참새가 방앗간을 가듯 즐겨 찾던 단골 생맥주집. 돌고 도는 인생이다. 누군가 길을 떠나고, 길 떠난 자리에 누군가 찾아온다. 오르막이 내리막이요, 내리막이 곧 오르막이다. 언젠가는 이 길의 어딘가에 머물게 될 것이다. 머무는 지점이 어디든 상관없다.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았나? 행복도 잠시이고 불행도 순간이다. 인간사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일은 옳고 그름이 공존한다. 세상일에 정답이 없음도 고갯길을 걸으며 길들어진다. 소소한 마음으로 편하게 살자.

김영균 이정 관세법인 대표, 前 울산세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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