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인스포팅 - 혼자일 때 느끼는 흔한 행복이 진짜다
트레인스포팅 - 혼자일 때 느끼는 흔한 행복이 진짜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9.07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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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보일 감독의 출세작인 <트레인스포팅>에서 렌턴(이완 맥그리거)은 막 나가는 양아치다. 원래부터 목적 없이 살았던 렌턴이 지금 빠져 있는 건 다름 아닌 '마약'. 그런 그에겐 비슷한 부류의 친구 4명이 있었는데 스퍼드(이완 브렘너)와 백비(로버트 칼라일), 식 보이(조니 리 밀러), 토미(케빈 맥키드)가 그들이다. 다혈질에 폭력적인 백비와 여자친구와 노는 게 더 좋은 토미를 제외하고는 다들 마약을 했는데 몸이 망가져 가면서도 그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는 하면 즐겁기 때문. 또 마약을 할 때만큼은 고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잠시 뒤 랜턴이 친구들과 마약을 하면서 독백하듯 말한다. "사람들은 마약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것이며 죽음을 부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마약이 주는 즐거움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즐겁지 않으면 우리는 마약을 하지 않는다. 우린 멍청한 바보가 아니다."

맞다. 말이 마약이지 마약하는 사람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는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같다. 바로 즐거워지기 위해. 다시 말해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수단이 불법적일 뿐, 목적은 같다. 솔직히 마약을 안 해도 세계평화나 인류공영을 위해 사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오히려 진짜 문제는 행복이 마약 같다는 게 아닐까. 그렇다. 행복을 위해 사는 우리는 모두 행복이라는 마약에 취해 평생을 살아간다. 해서 옳음은 좋음을 이길 수 없고, 즐겁지 않으면 악한 거다.

그 즈음, 다섯 친구들 가운데 나름 똑똑한 식 보이가 렌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둘은 마약의 유일한 단점인 주변의 질타와 멸시가 싫어 잠시 마약을 끊게 됐는데 함께 금단 증상을 겪던 중, 식 보이는 이런 자신만의 인생 철학을 늘어놓는다. "이건 분명 인생을 살면서 나타나는 한 현상일 뿐이야. 득이 있으면 실이 있는 거지. 인생은 이런 식으로 영원히 지속되지."

또 맞다. 행복의 유일한 단점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마약에 금단(禁斷) 증상이라는 고통이 있듯 행복이라는 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금단 증상을 겪게 된다. 다시 말해 득이 있으면 실이 있듯 좋았으면 좋았던 만큼 나빠야 한다. 끝이 있는 게 어떻게 행복일까. 아니나다를까 잠시 뒤 화면에선 말을 잘 듣던 개가 갑자기 주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렌턴과 식 보이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단 증상 속에서도 나름 즐거운 일을 찾던 렌턴은 친구 토미의 집에서 그가 여자친구와 함께 찍은 섹스 비디오테이프를 몰래 훔쳐 식 보이와 보다가 성욕이 돋게 된다. 클럽을 찾은 렌턴. 오늘 사고 친다는 생각으로 섹시한 자태의 다이앤(켈리 맥도날드)에게 접근해 마침내 그녀를 꼬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 거사를 치른 렌턴은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녀가 고등학생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감옥행이 두려워 도망치듯 다이앤을 내치게 된다.

헌데 다이앤은 평범한 고삐리(고등학생)가 아니었다. 성숙했던 만큼 나름 현명한 소녀였던 것. 마약을 끊고 섹스에 몰입해 보려 했더니 그것도 잘 안되자 렌턴은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더욱 엉망진창이 된다. 그런 렌턴을 찾은 다이앤. 그녀는 렌턴의 고민을 듣고는 이런 조언을 한다. "넌 애가 아니야, 렌턴. 세상은 변하고, 음악도 변하고, 약물도 변하지. 종일 마약만 찾으면서 방구석에 쳐박혀 있으면 안 되지. 뭐든 영원할 순 없어. 내 말의 요점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봐야 한다는 거야." 하긴, 다시 마약에 손을 댄 뒤 몽롱하게 빠져드는 행복의 맛에 취하면서 렌턴도 이런 독백을 했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튼 그녀의 조언에 렌턴은 마약을 끊고 부동산 중개업소에 취업해 새로운 삶과 함께 비로소 '일상'이라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사실 렌턴이 그럴 수 있었던 건, 혼자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다시 손을 댄 마약으로 역대급 금단 증상을 겪으면서 예전 식 보이의 인생 철학을 드디어 이해했기 때문이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다는.

다시 하게 된 마약으로 그나마 착한 친구인 스퍼드만 감옥에 들어가자 그게 괴로웠던 렌턴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독백한다. "스퍼드 대신 내가 감옥에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 난 가족과 친구라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혼자라고 느낄 일이 없는 것이다.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은 고달픈 거지만 고독은 즐기는 거다. 습자지 한 장 차이라는 것. 해서 혼자일 때 느끼는 흔한 행복이 진짜가 아닐까.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까. 변할 일이 없으니까. 득도 실도 없지만 행복하니까. 더이상 쪼개질 수 없어 쪼개짐의 아픔이 없는 '원자(原子)' 같은 행복이랄까.

20여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땐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저 "양아치들 패션쇼"나 하는 작품인 줄 알았더랬다.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었고.

그러다 얼마 전 여름휴가 때 급땡겨 오랜 만에 다시 보게 됐는데 이렇게 달라져 보이더라. 기다 찬다. 진짜. 아니, 그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1997년 2월 22일 개봉. 러닝타임 93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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