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적과 피아식별
주적과 피아식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9.0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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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1진은 1945년 11월 23일에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미군은 이들의 환국을 위한 수송기를 제공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 입국임을 강조했다.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앞둔 충칭(重慶)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석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임정 요인 200여 명을 초청해 송별연을 베풀었다. 김구 주석은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이때 장 주석이 “장래 중·한의 영구 행복을 도모하자”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임정 요인들을 환송한 것은 장제스뿐만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조촐한 환송연을 베풀어줬다고 백범은 술회했다. 당시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항일전쟁을 위해 손을 잡고 있던 때였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동지적 관계였던 임정 요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새 나라 건설을 위해 떠나는 이들을 우의롭게 응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연합국으로 동맹관계였다. 이들 공동의 적은 일본이었다. 임정도 1941년 12월 10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면서 중국은 물론 미국, 영국, 소련과 동맹으로 인식했다. 임정은 1944년 좌우 인사들을 아우르는 좌우연합정부로 진용을 갖췄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벌인 2차 국공내전은 1946년 6월 시작됐다. 가짜 나라 만주국을 점령한 소련군은 국공내전 직전인 1946년 5월 만주국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당에 넘겨줬다.

적어도 중국의 국공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중국 국민정부와 소련의 우호관계는 유지됐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한국전쟁 때부터이다.

정리하면 일제강점기, 다시 말해 항일독립투쟁기 우리에게 중국과 미국, 영국, 소련은 동맹에 가까운 우호국이었다. 주적(主敵)은 일본이었다.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부적(副敵)쯤 될 것이다.

일본이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수락한 것도 두 차례의 원자폭탄 피폭과 함께 소련군의 대일본 선전포고에 이은 대공세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소련군의 침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이 상정외(想定外)의 허를 찔린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943년 사망한 장군이 한때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전력이 철거해야 하는 이유라고 한다.

장군은 무장항일투쟁의 지속을 위한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것이 장군이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주이유였다.

적군이었던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복무했던 사람들이 광복 이후 국군 창군에 많이 참여했다. 이들이 국군의 초석을 놓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일본군의 패전 이후에도 일본 덴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패전한 일본에서는 이들이 설 땅도 없었다. 이들의 일본군 또는 만주군 복무경력이 친일행위가 아니냐는 논란은 미뤄두더라도 최소한 애국행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육사가 애국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을 홀대하는 것은 피아식별(彼我識別)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홍 장군이 1920년대 소련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것은 임정의 광복군 대원들이 1940년대 미국 전략사무국(OSS) 대원으로 편입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불과하다. 일본의 사관학교나 만주 군관학교에 자발적으로 입교해 적군에서 복무한 것과는 결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당시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한 것은 일본군의 입장이다. 한국 육사가 우리의 주적이었던 일본군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강귀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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