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접질려 본 이들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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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9.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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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김현미-우리의 어디가 사랑이었나

‘시를 읽거나 쓰거나 생각하는 일’은 무엇일까 보다 ‘왜?’라고 묻는 편이 더 어울리는 시작이다. ‘끝없이 모욕당하는 것 같은 이 삶의 강가에서 떠나지 않고, 떠나는 한 방법’이 시(詩)라고 한 수 가르쳐주는 시인이 남긴 첫 말이다.

서정(抒情)을 외면하게 만드는 현실이 우울하다만 간단없이 치고 들어오는 감정 혹은 정서조차 뿌리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기쁨과 슬픔이 반반이라지만 어느 때는 한쪽으로 쏠리기도 하니까.

김현미 시인 시집, ‘우리의 어디가 사랑이었나’. 스스로 묻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랑한 적은 있었나요?’라고까지 나아 갈 필요는 없다. 사랑이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여 헤아림’이라는 뜻을 가진 사량(思量)이어서 시집에 실린 시편 모두는 그 덩어리인 ‘삶’이 남긴 파편임이 분명하다.

자신 이야기만 하지 않고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에 애정을 듬뿍 담아 ‘미량의 슬픔’이란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려준다. ‘사연 있는 사람의 적당한 통속’은 유치하기는커녕 순간 발화해 삽시간에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그것은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누리는 행복으로 순치(馴致)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아득히 먼 곳’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라고 말하는 사람’을 언급한다. 그 사람이 남긴 말을 순순히 받들었으나 행동은 반대로 하건만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고 떠난 사람이 생각났다// 나는 둥근 길을 걸어 귀가했다’라고. 차라리 자신이 상처받을지언정 타인을 끝까지 보듬는 마음이다. 이런 자세는 전 시편에 흐르는 기조다. 담담, 덤덤하게 읽히다가도 울컥하게 하는 뒷심이 오래도록 남는다.

‘블랙 스완 1’에서는 ‘자주 길을 잃고 자주 쓰러지고 자주 멍들었더니/ 외발서기 연습하는 것도 보았어요/ 비밀인 거 알아요/ 반드시 들통나야 하는 것의 이름이죠’라며 균형 잡힌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토로한다. 산다는 일은 ‘기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시인은 ‘초록’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하다. 표지화는 에곤 실레가 그린 ‘초록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소녀’(1913년 작, 그가 죽기 5년 전 남긴 그림)다. 뿐만 아니라 앞서 잠깐 언급한 시, ‘아득히 먼 곳’을 비롯 ‘인셉션’, ‘술, 노래, 밥, 눈물’, ‘낙화의 방향’ 등 곳곳에서 발견된다. 초록은 파랑 다음으로 굴절률이 높은 색이다. 과하게 밝지도 않지만 과하게 어둡지도 않은 적절하고 적당한 자기 색깔이다. 시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지점인 평안, 안도, 안온함이 동시에 작용하는 이유가 된다.

‘사물에 맺힌 감성들을 격이 높은 서정시로 치환하는 시를 주로 발표’한다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간 김 시인 시를 접한 독자들은 파장이 얼마나 큰지 단박에 눈치챈다. SNS에서 이미 이러한 영향력은 확인된 지 오래다. (필명은 ‘지산’) 그가 매만진 모든 시는 혼자 속앓이한 게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상처 또는 상흔을 치유하는 힘을 발휘한다. 모두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의미심장한 은유에 대한 욕망, 치열함’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손사래 치지만 아니다. 겸손을 가장(假裝)한 말은 더욱 아니다. 그런 점을 증명하는 시 한점을 글 끝에 둔다.

‘이 세상에서 ‘슬픔’이란 말과 가장 닮은 것은/ 수평선이다/ 끝이 없으니까// 이 세상에서 ‘희망’이란 말과 가장 닮은 것은/ 지평선이다/ 붙잡을 수 없으니// 이 세상에서 사랑이란 말과 가장 닮은 것은/ 나무 한 그루이다// 전속력을 다해/ 땅과 하늘의 중심으로만 질주하니’ <‘닮은 꼴’ 전부>

표 4에 남긴 시인이자 여행작가인 최갑수 선생이 남긴 말이 인상 깊다. ‘그는 어떤 삶을 여행했길래, 이런 시를 썼을까? 한 편 한 편 수를 놓듯 문장을 전개해 나가는 일에 시인의 정성과 진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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