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총리·각료, 박상진 의사 生父 제출 구명청원서 심사
日 총리·각료, 박상진 의사 生父 제출 구명청원서 심사
  • 강귀일
  • 승인 2023.08.13 21: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사형집행 한 달 전인 1921년 7월 9일 심사 완료해
-고헌 사형집행 한 달 전 완료… 구명운동은 물거품
-추모사업회, 일본내각조사서 등 사료 30여 건 발굴
-“전문가 번역·연구조사 거쳐 학술자료집 발간 필요”
지난 11일 울산시 북구 송정동 ‘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에서 새로 발굴된 고헌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고헌의 증손이자 추모사업회 학술자문위원인 박중훈씨.
지난 11일 울산시 북구 송정동 ‘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에서 새로 발굴된 고헌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고헌의 증손이자 추모사업회 학술자문위원인 박중훈씨.

울산출신 독립운동가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사형이 확정된 이후 생부(生父) 박시규(朴時奎, 1861~1928)가 일본 내각에 제출한 구명청원서가 실재했고 당시 일본 하라(原) 내각이 고헌 사형집행 한 달 전인 1921년 7월 9일 이 청원서에 대한 심사를 완료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헌의 순국 기념일인 지난 11일 고헌의 증손이자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 학술자문위원인 박중훈씨는 울산시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발굴된 고헌 관련 자료 5건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자료들은 광복회 평안도 지부장이었던 조현균의 현손인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 소장과 박 위원이 2021년부터 벌인 고헌 관련 해외자료 발굴 작업의 성과물들이다.

공개된 자료는 박시규 구명운동 관련 2건과 그동안 찾지 못했던 광복회 관련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문(1919. 2. 28.), 고헌의 동생 박하진 판결문(1918. 9. 11.), 여류시인이자 일본 여성사학의 창설자라 불리는 다카무레 이쓰에(高群逸枝)의 고헌 관련 시(詩) 1편 등이다.

박시규 구명운동 관련자료는 박시규가 일본내각에 제출한 청원서에 대한 내각의 심의조사서(1921. 7. 9.)와 우쓰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조선군사령관 관계문서 문서 가운데에서 찾은 ‘박상진 판결 변론서(1920. 2. 19.)’다.
 

박상진 의사의 사형 확정 이후 생부 박시규가 일본 내각에 제출한 구명청원서를 내각이 심사하고 하라(原)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이 서명한 심사조사서.
박상진 의사의 사형 확정 이후 생부 박시규가 일본 내각에 제출한 구명청원서를 내각이 심사하고 하라(原)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이 서명한 심사조사서.

 

◇ 하라 다카시 일본 총리 비롯한 각료 전원 박시규 제출 청원서 심사 서명

일본내각의 심사조사서는 박시규가 사형이 확정(1920. 11. 4.)된 아들에 대한 선처를 당부하는 청원서를 일본 내각에 제출했고 일본내각이 이를 접수해 심사 완료했다는 기록이다. 조사서에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하라 다카시(原敬)를 비롯해 사법대신을 제외한 각료 전원(11명)이 서명했다. 이 서류는 고헌의 사형이 집행되기 한 달 전에 작성됐다. 고헌의 사형은 1921년 8월 11일 집행됐다.

고헌은 생부의 구명운동을 만류했다. 그러나 박시규는 사형집행 사흘 전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아들의 구명운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1921년 2월 17일자 기사에는 “박시규가 경주지방을 순시하는 총독(사이토 마코토, 齊藤實)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려다 경관의 제지로 실패했으며 이후 동경으로 건너가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번에 발굴된 조사서가 바로 이 탄원서에 관한 것이다.

박 위원은 2021년 발표한 저서 ‘역사 그 안의 역사-광복회총사령 박상진과 가족이야기’ 등에서 박시규가 일본 중앙정계를 대상으로 구명활동을 벌인 것은 아시아 전역으로 세력확장을 노리던 일본 우익정객들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폈다. 박 위원은 이번에 발굴된 조사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주장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고헌을 염탐하는 밀정이었던 김재현이라는 인물이 아들을 구해보려는 애타는 심경이었던 박시규에게 접근해 일본 중앙정계의 실력자들을 상대로 하는 구명운동을 권유했다는 얘기도 박 위원의 집안에서는 전해졌다.

박 위원이 추정하는 일본 우익정객들의 노림수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내란범에 대해서도 일본은 관용을 베풀었다’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들의 목숨을 구제받기 위한 부친의 행동을 비루하게 조장해 고헌의 독립운동을 폄훼하겠다’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어느 쪽이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권의 기류와는 기조가 달랐던 조선총독부는 서둘러 고헌의 사형을 집행해 박시규의 구명운동은 허사로 끝났다.

3·1운동 발발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자로 발표된 광복회 사건에 대한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문.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자료다.
3·1운동 발발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자로 발표된 광복회 사건에 대한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문.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자료다.

 

◇ 광복회 사건 공주지법 1심 판결문, 고헌 동생 박하진 판결문 등 발견

고헌은 광복회 사건으로 모두 6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문은 찾을 수 없어 관련 연구가 부족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판결문 사본(139쪽 분량)을 확보하게 돼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발굴된 박하진 판결문으로 고헌의 양가 동생인 박하진이 고헌의 옥바라지를 하다 뇌물공여죄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새롭게 알려졌다. 박 위원은 이를 토대로 박하진의 공적심사를 보훈부에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일본 진보적 지식인, 고헌 순국 칭송·일본 제국주의 힐난

1885년 대과에 급제하고 규장각 부제학을 지냈던 박시규는 1923년 아들의 대상 때 제망자상진문(祭亡子尙鎭文)이라는 장문의 제문을 지었다. 이 제문에는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애끓는 슬픔과 사랑, 그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담겼다.

제문에는 고헌 사후 박시규가 일본 체류 중일 때 청나라 황족 원헌(原憲)이 고헌의 업적을 칭송하며 만사(輓詞)를 지어준 일과 어느 인도인이 찾아와 인도에서도 고헌의 위업을 본받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전해준 일화가 소개돼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에서 다카무레의 시, ‘오수시의 제도(午睡時の帝都)’가 발견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고헌의 순국을 칭송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행태를 힐난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다카무레는 일본에서 여성사(女性史) 연구의 지평을 연 아나키스트였다. ‘오수(午睡)’는 ‘낮잠’이라는 뜻의 한자어다. 이 시는 제국주의 망상에 빠져들고 있던 당시의 일본정부를 한심한 집단으로 규정하며 조롱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시에는 박시규와 박상진이라는 실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다카무레는 이 시에서 조국을 찾겠다는 박상진을 강도, 살인, 방화범이라는 오명을 씌워 처형한 일본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박상진 부자를 칭송했다.

이번에 발굴된 고헌 관련 자료는 6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모두 당시의 일본문으로 기록돼 있다. 전문가의 번역과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박중훈 위원은 이날 기자회견 말미에 “이 소중한 자료들을 번역하고 연구해 자료집으로 엮으면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한 각계의 관심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귀일 기자

박시규가 1885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 홍패는 대과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는 합격증서.
박시규가 1885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 홍패는 대과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는 합격증서.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