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3층’
영화 ‘13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8.03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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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데카르트(1596~1650)가 남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은 너무도 당연한 듯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니? 생각을 하든 안 하든 나나 당신, 혹은 세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잖은가? 지금 이렇게 버젓이. 훗, 과연 그럴까?

사실 우리가 진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철학이라는 학문에선 굉장히 오래된 난제였다. 우선은 우리, 그리고 이 세상이 속해 있는 ‘우주’라는 공간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아니 영원히 알 수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주에 끝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 밖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가 가장 큰 문제. 어마어마하게 넓은 이 우주의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다 이상하긴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 사는 우린 대체 뭔가? 존재하는 거 맞나?

한편 잠을 자는 것도 이상하다. 잠이 들었을 땐 정체불명의 우주공간 속에서 소위 현실이라 부르는 이 세계와는 단절이 이뤄지기 때문. 대신 꿈을 꾸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한낱 꿈일 뿐이라고? 영화 <인셉션>에도 나오는 대사지만 꿈속에서도 고통은 느껴지고, 가끔은 꿈속에서 잠을 자면서 꿈속의 꿈을 꾸기도 한다.

헌데 만약 어떤 사람이 수면 중 한참 꿈을 꾸다 심장마비 같은 것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꾸던 꿈속 세계는 여전히 한낱 꿈일까? 아마도 꿈속 세계를 현실로 인식하면서 그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렇듯 인간의 의식이란 건 똑똑하지 않다. 꿈을 꾸며 헛소리를 하거나 악몽을 꾸다 기겁을 하며 깨어날 정도로 잘 속는다. 그러니까 꿈을 꿀 땐 그 세계가 진짜라고 인식해버릴 정도로 멍청하다는 것. 그렇게 잘 속아 넘어가는 게 인간의 의식인데 우리가 현실이라 인식하고 있는 지금 이 세계를 과연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혹시 이것 역시 속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잖은가. 병이든 노화든 막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의 의식이 서서히 사라져갈 때, 그는 자신이 살아 온 지난날들이 한낱 꿈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잠시 뒤, 육신만 남겨두고 사라진 그의 의식이란 게 사막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신기루와 뭐가 다를까. 1시간이든 천년이든 지나고 나면 똑같은 ‘찰나(순간)’가 되어버리기 마련. 만약 그가 평생을 무인도에서 홀로 지내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은 게 되어버린다. 아니, 당장 불의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만 빠져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이러니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생각을 통해 내 존재를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헌데 지금까진 데카르트가 살았던 17세기 중반까지의 이야기다. 19세기로 접어들어 과학이 발달하면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바로 광자(光子)나 전자(電子)처럼 미시세계의 물리학을 연구하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이 등장한 것. 특히 ‘이중슬릿 실험’에 의해 광자나 전자처럼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최소단위가 평소에는 파동으로 중첩돼 수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하다가 관측(상호작용)이 이뤄지면 입자(물질)로 돌변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또 광자나 전자보다 좀 더 사이즈가 큰 것들도 똑같은 실험 결과가 도출되면서 엄연히 물질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와 이 세계는 관측행위가 없으면 물질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쉽게 말해 우리가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이 지구상의 한 사람이라도 보니까 파동으로만 존재하던 달이 비로소 입자가 되어 물질처럼 존재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양자물리학자인 닐스 보어(1885~1962)의 이 같은 주장에 반발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1879~1955)이 벌인 논쟁은 지금도 과학계의 전설로 남았다.

아무튼 여기서 한술 더 떠 어니스트 리더퍼드(1871~1937)라는 양자물리학자가 실험을 통해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原子) 내부가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홀로그램(3차원 입체영상)일 뿐이라는 주장까지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신기루일 수 있다는 것. 또 우주가 홀로그램이라면 지금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 끝내주는 그래픽 카드가 장착된 하나의 시뮬레이션 게임 속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게임 안이라면 게임 밖에서 우릴 조종하는 존재도 있지 않을까. 어이없고, 머리 아프죠? 나도 미치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겨우 ‘홀로그램 우주설’까지 도달하게 됐고, 영화 <13층>은 이 홀로그램 우주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근본도 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 1999년 개봉 당시 <매트릭스> 1편이 그해 먼저 개봉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묻혔지만 나름 수작(秀作)이니 <매트릭스>시리즈나 <인셉션>같은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적극 추천한다. 요즘 여름휴가 기간이기도 하니. 그나저나 오늘 밤엔 다들 귀가하시면서 달을 한 번씩 꼭 쳐다봐 주시길. 다들 수평으로 펼쳐진 좋은 집과 좋은 차만 바라보며 사는 마당에 아무도 안 봐주면 자칫 파동으로 변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1999년 11월 27일 개봉. 러닝타임 98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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