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하 추모사업, 이대로 좋은가?
송석하 추모사업, 이대로 좋은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7.1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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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는 1948년 사망했다. 당시 45세였다. 서울 망우리에 묻혔다가 지난 1996년 충남 태안으로 이장됐다. 그의 유해는 아버지 송태관이 간척한 서풍농장을 바라보는 구릉에 안장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개관 50돌 기념행사에서 국립민족박물관을 자기 뿌리로 삼으면서 송석하를 적극적으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이달의 문화인물’로도 선정했다. 민속박물관 주도로 ‘송석하 영웅 만들기’를 시작한 느낌이다.

이때부터 송석하는 민족적 민속학자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특히 국립민속박물관이 앞장섰다. 그러나 송석하는 학자이기보다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문화운동가라는 평가가 더 어울린다. 일제 강점기에 권력에 다가가 침략을 옹호했던 이력을 보면 더욱 그렇다.

송석하가 우리 민속학의 대부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그의 부친 송태관의 부(富)가 있었다. 송태관은 순사로 입직했다가 김홍조의 권유로 개성학교를 졸업했다. 1899년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해서 동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는 일본 최초의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이다. 1904년 10월 탁지부(度支部=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고문으로 부임했지만, 1907년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불신을 받고 고문직에서 물러났다. 1905년 3월 탁지부 주사에 임용됐다가 1년 반 만에 9품에서 정3품으로 오른 송태관의 벼락출세와 진도 유배(1907년 9월)는 메가타의 임용과 실각 시기와 비슷하다. 조선에 연고가 없던 메가타에게 송태관처럼 일본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은 특별히 소용이 많았을 터이다.

송태관은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목배(木杯)를 4차례 받았고, 울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도 지냈다. 송태정미소를 경영하다가 1916년 사기, 횡령, 무고, 절도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때문에 일신학교의 제2대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황실로부터 받은 훈3등 훈장도 삭탈되고 말았다. 이후 활동무대를 부산과 서울로 옮겼다. 그 이전 1913년 언양에서 괴한에게 습격받아 중태에 빠진 일과 1915년 7월 반구리 집에 든 강도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출소 후 송태관은 경제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1923년 경남은행 두취(頭取=은행장)직 해임으로 끝이 난다. 지금까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반등 공황으로 인한 손실까지 더해져 송태관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다. 그의 재산은 온전했고, 오히려 서산의 간척권까지 인수하며, 사이토(齋藤) 총독(제 3대, 5대)을 6차례나 만나 서산과 태안의 간척 허가를 받아내 재기에 완전히 성공하게 된다. 그런데도 그는 소작인을 괴롭힌 울산의 악질 지주 중 한 사람으로 1931년 12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등장한다. 그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일제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일제와 인연을 이용해 재기하고, 소작인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송태관이 이룬 부는 한 마디로 정의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유학을 계기로 입신양명했다. 따라서 일본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은혜를 베푼 곳이다.

송석하는 부친의 부를 향유했고 그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송태관이 다닌 개성학교와 동경상업고등학교, 송석하가 다닌 부산제이상업학교와 동경상과대학(1949년 히토쓰바시대로 개칭)은 같은 학교다. 송석하의 진학에는 부친의 강력한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대한 부자(父子)의 인식이 서로 달랐을까? 해방정국에서 보인 그의 갈지자 행보로 갈음할 수 있겠다.

2024년은 송석하 탄신 120주년이 되는 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많은 행사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그러나 현 ‘민속박물관’의 뿌리를 옛 ‘민족박물관’으로 삼고, 그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송석하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등한시해서 송석하를 추켜세우려 한다면, 커다란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의도 아니고 공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송석하를 재조명해야겠다면 공(功)과 과(過)를 모두 다루어야 한다. 부끄럽고 잘못한 과거를 반성할 수 있어야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모름지기 역사를 두려워하고 역사 앞에서는 겸손해야 할 것이다.

박중훈 울산북구역사문화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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