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의 세상, 보길도
윤선도의 세상, 보길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7.10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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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와 인연이 없는 줄 알았다. 수년 동안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해남에 머물고 있을 때 지인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여기서 보길도를 못 가고 돌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윤선도의 원림(圓林)을 꼭 보고 싶었다. 무작정 용기를 낼 만큼 가까운 곳에 선착장이 있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시대의 문인이다.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권신을 규탄하는 소를 올려 유배되기도 했다. 대군 시절 효종의 스승이었다.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 생활을 했다.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하자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보길도에 별서를 짓고 생활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 탁월한 문학작품을 많이 남겼다.

보길도 원림에는 윤선도 문학관과 세연정이 있다.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의 세연정(洗然亭)은 이름 그대로였다. 하늘을 담은 연못 세연지(洗然池)는 말간 얼굴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주변의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건축학적 의미를 떠나 세연정의 봄은 아름답다. 여리고 여린 새싹들이 손을 내밀고 세연정은 사방으로 문을 열어 봄기운을 가득 품는다. 주변의 풍경은 정자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니 절로 공부가 되고 시상이 떠오를 것 같다.

연꽃 봉오리가 터져 퍼지는 것 같다고 이름 붙인 부용리에서 보면 윤선도의 서재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산속에 아득하다. 작은 다리를 건너 돌탑이 많은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시원한 그늘 아래 새 소리를 들으며 오르막길을 30분 정도 오르면 나타난다. 먼저 보이는 것은 문과 창이 한 개뿐인 한 칸 규모의 작은 집이다. ‘침실(寢室)’이라는 편액에다 아궁이도 있어 겨울에는 불을 넣었던 것 같다.

위쪽에 보이는 동천석실은 부용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윤선도가 특히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명승’이라 했던 곳이다. 문을 열어 보니 딱 한 칸짜리 정자다. 휴식과 독서를 위해 산허리의 바위 위에 마련한 집으로, 윤선도가 이 일대를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로 구현한 것이다.

산 중턱에는 바위를 깎아 암벽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모았다는 작은 연못 ‘석담(石潭)’이 있다. 또 멀리 조망하기도 좋은 넓고 큰 차 바위에는 찻상을 고정하는 홈이 네 개 패어 있다.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은 석실 앞 바위와 건너편 낙서재(樂書齋)를 연결하는 동아줄을 걸어 통 속에 음식물 등을 넣어 날랐다고 전한다.

한 칸 규모의 정사각형 동천석실은 북쪽을 제외하고 삼면은 문이나 창을 내어 주변의 경관을 음미하기가 좋다. 밖을 보면 동리 입구인 세연정 주변이 내려다보이고, 살림집이 있는 윤선도의 낙서재와 그 아래 곡수당(曲水堂)이 눈에 들어온다. 전경이 마치 산수화 같다. 보길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춥지도 덥지도 않고 눈도 많이 오지 않는다. 윤선도만의 세상이었다.

고산의 주된 주거 공간이었던 낙서재는 1637년 보길도에 입도하여 섬의 주산인 격자봉의 혈맥을 쫓아 집터로 삼은 3칸의 초가로 된 집으로 독서와 작품활동을 한 곳이다.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뒤편의 큰 바위인 소은병, 달 구경하던 귀암, 서재, 전사청, 무민당 등 25동 건물을 지어 신선처럼 살았다.

서재는 곡수당 남쪽 중앙에 있는 강학을 위한 집으로 고산에게 글을 배우던 곳이다. 양쪽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곡수당은 격자봉에서 흐른 물이 이곳에 이르러 곡수를 이룬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휴식하던 장소였다. 상연지는 높이가 한 길 정도 되는 방대 위에 가산을 만들고 허리 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 돌로 된 통을 끼워 뒤에서 끌어온 물이 구멍을 통해 연못으로 쏟아지게 했다. 특이한 구조로 과학적이다.

송시열의 글이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백도리로 들어가면 나온다. 우암 송시열이 숙종 때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려 83세로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륙했던 곳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시를 큰 바위에 새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송시열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보듯 윤선도와 늘 적대관계였다. 선후를 떠나 경치가 좋은 곳에 터를 잡은 윤선도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나도 부럽기 그지없지만, 윤선도의 세상을 엿본 것으로도 족하다.

김윤경 작가·여행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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