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자 송석하…」의 ‘저자 후기’
「민속학자 송석하…」의 ‘저자 후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7.09 2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인을 아는 분들에게는 매우 민감할 수도 있는 책 한 권을 얼마 전 입수하게 되었다.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富)와 학문』(민속원)이란 288쪽짜리 책으로, 민속학에 대한 깊이가 엷은 필자로서는 곧바로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츰 호기심이 생겼고 눈길도 주기 시작했다.

어떤 책이든 그 속살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저자의 고백(독백)을 엿보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뒤적거린 것이 지은이 오석민의 ‘저자 후기’였다. 제주에서 태어난 저자는 민속학이나 향토사 관련 책을 여러 권 펴냈고, ‘충남역사박물관장’ 직을 거쳐 지금은 ‘지역문화연구소 소장’과 ‘세종시 무형문화재위원’ 직함을 갖고 있다. 저자 후기를 열어젖히기에 앞서 책 속의 주인공 송석하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짚고 넘어가자.

송석하(宋錫夏, 1904∼1948)의 고향은 울주군 양등리다. 그러다 보니 울산 사람 중에는 그를 ‘울산 출신 민속학자’ 또는 ‘한국 최초의 민속학자’라 부르기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울산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의 행적을 긍정의 눈으로 보는 이들은 ‘송·석·하’란 이름을 낮추어 부르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집중포화를 퍼붓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그 전까지 들은 송석하에 관한 얘기는 ‘카더라’ 수준의 지극히 짧은 필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돈 많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젊어서는 최고급 사진기를 들고 전국을 누비면서 숱한 기록물을 남겼으며, 해방 후엔 서울대학교에 ‘민속학과’를 처음 생기게 만든 대단한 분이었다는, 그렇고 그런 얘기였다. 곧이곧대로 듣다 보면 나도 몰래 존경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인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민속학자 송석하…』의 ‘저자 후기’를 읽은 뒤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귀동냥으로 들은 그의 일대기와는 사뭇 딴판인 정서가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인지, ‘저자 후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18년 여름에 쓰기로 마음먹었던 책의 주제는 ‘조선 후기 소금의 정치경제학’이었다.… 그런데 태안문화원에서 다시 ‘전통 자염’에 대한 고증보고서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조사과정에서 송석하를 만나게 되었다. 총독부 관보에서 그의 아버지 송태관(宋台觀)이 태안에서 소금 생산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에서 100만 평 규모의 간척공사를 진행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해미에서도 20만 평을 간척하고, 만리포해수욕장 인근 10만 평의 임야를 불하받은 사실도 확인했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호였음이 분명했다.…”

저자는 그때까지도 송태관에 대한 기초 연구는 없었고, 그가 송석하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어렵게 확인했다고 밝힌다. 그는 또 2004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송석하 전집에 실린 연보에는 고향만 언급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왜 문화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다고 평가받으면서 ‘문화민족주의자’로 추앙받는 인물의 가계를 소개하지 않았을까?”라고….

지은이 오석민은 박중훈(울산북구향토사연구소 소장), 이용찬(정읍문화재지킴이 회장) 두 분을 ‘공동저자’라고 부른다. 그분들의 지론을 고스란히 인용한 데 따른 보답이지 싶다. 그러면서 저자 후기 끄트머리에 집필 동기를 이렇게 고백한다.

“2022년 6월 ‘조선민속학회 9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그 분위기는 송석하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고, 필자와 남근우 교수가 다른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일부 학회에서 송석하 묘역(충남 태안군)에 공적비를 건립한 것은 그해 8월이었다. 이에 송석하를 영웅시하는 일만은 방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김정주 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