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하는 ‘저항적 문화민족주의자’였을까?
송석하는 ‘저항적 문화민족주의자’였을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7.0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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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宋錫夏)는 1904년 울주군 양등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송태관(宋台觀)과 경주최씨 사이의 장남이었다. 그는 울산보통학교와 부산제이상업학교(현 개성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그가 동경상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23년 8월 송태관은 경남은행 두취(頭取=은행장)에서 해임되었다. 그다음 달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그해 말에 귀국했다.

아마도 경제적 이유와 지진을 겪은 트라우마 때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후자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귀국 후 송석하는 탈춤 등 민속에 관심을 두고 민속품을 수집하는 등 여유 있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송태관의 사회적 평판은 실추했지만, 경제적 타격은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울산 곳곳에 산재한 전답과 산판이 건재했던 데다 사이토 총독을 만난 뒤에는 서산과 태안의 간척 허가까지 받아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은행의 부실 경영에 뒤따르는 형사적 문제도 잘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송석하는 1929년 이후 민속학 관련 글을 썼고, 1932년에는 정인섭, 손진태 등과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했다. 학회에는 일본인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와 경기도 경찰부장 출신 이마무라 도모에 등도 참여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권력과 권위가 필요했고, 일본인들은 민속학을 이해하는 조선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속학회는 기관지 『조선민속』을 세 차례 발간했다. 1940년 제3호를 이와무라의 고희를 기념하는 특집호를 일본어로 발간했다. 한국인 필진은 민요의 채가(採歌)와 채보(採譜)에 일가견이 있던 김덕규, 이종태, 한기승(제2호)과 정인섭(창간호), 손진태, 송석하(제1, 2, 3호), 임철재, 김두헌(제3호)이 다였다.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들의 활동무대였다.

송석하는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을 개관하고 초대 관장을 맡았다. 미군정청 문정관인 인류학자 크네즈(Knez, E.I.)의 도움이 컸다. 그는 학문에 몰두했던 학자라기보다 민속문화의 보존과 보급, 학술단체 기여 등 문화운동에 관여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할 것이다.

송석하는 우리 민속학을 이끈 민속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제가 지식인들을 황도(皇道) 진영으로 끌어들여 친일(親日)로 변절시킨 그 엄혹한 시기를 용케도 버텼다고 생각했다. 국립민속박물관도 1996년 개관 50돌 기념행사에서 ‘국립민족박물관이 뿌리’라고 주장하며 송석하를 적극 조명했다.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이듬해에는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다. 이때부터 송석하를 ‘문화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고. ‘문화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는 주장도 폈다. 이런 평가를 비판한 것은 남근우 교수가 유일했다.

올해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 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란 저서가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2022년 열린 학술회의에서 송석하의 일제 강점기의 활동과 식민지 권력 관계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민속박물관은 보란 듯이 두 달 후 그의 묘역에 공적비를 세웠다.

조선 총독부는 1930년대 조선 농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다. 이를 위해 총독부는 ‘전통 오락’ 발굴에 나섰다. 먼저 ‘조장 보급’할 종목을 선정해 개량하고자 했다. 봉산탈춤 등 송석하가 애쓴 소위 ‘조장할 농촌의 전통 오락’은 총독부의 ‘건전한 전통 오락’의 육성과 보급에 화답한 결과였다. 남근우 교수는 ‘향토무용민요대회’와 ‘오락선도론’ 등의 실증적 사료 분석을 통해 그가 식민지배정책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밝혔다.

송석하는 1943년 ‘백두산탐구등행단’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참가했다. 이 행사는 총독부 학무과와 조선체육진흥회 구방동행훈련단이 공동 주최했다. 이 등행단 제전반의 사업에는 ‘백두산 천지에 배를 띄워서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와 ‘북변 수호를 기원하는 제단 설치’가 포함돼 있었다. 일제의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였다. 1944년 8월에는 ‘영미’를 비판하면서 ‘가열한 성전(聖戰)의 대마루싸움판’을 옹호했다.

이와 같은 송석하의 활동은 ‘조선민속학이 문화민족주의에 입각한 토착주의 저항 담론’이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친일 행적은 더 발굴될 여지도 있다.

박중훈 울산북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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