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폐의약품 배출
슬기로운 폐의약품 배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7.02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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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에 손가락을 심하게 다쳐 수술한 적이 있었다. 마취한 덕분에 수술할 때는 아픈 걸 별로 못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 마취가 풀리자 누군가가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는 듯 통증이 심했다. 그때 진통제를 먹으니 거짓말처럼 아픔이 사라졌다. 약이 그때처럼 고맙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희생과 어려운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치료해주며 상처를 낫게 해주어서, 평균수명을 늘려주는 데에 그 무엇보다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을 지켜주려고 개발된 약이 잘못된 폐기 방법 때문에 자연환경을 해치고 병들게 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폐의약품의 55%가 일반 쓰레기로 처리되거나 하수구로 배출되고 있다. 분리배출이 의무사항이 아니다 보니 관리가 더 안 되는 실정이다.

먹거나 바르던 약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 부패하거나 변질되어 못쓰게 된 약도 생긴다. 이때 무심코 폐의약품을 일반 쓰레기와 같이 버리는 행동이 땅과 물을 오염시키고 유전자 변이로 생태계 교란까지 일으킨다고 한다. 또 슈퍼박테리아 등 내성균의 확산으로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고 한다.

2020년엔 낙동강에서 뇌전증 치료제 가바펜틴이 검출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것은 정수장을 거치면서 독성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변질되어 가정용 수돗물로 공급될 수 있다니 충격적이다.

국립환경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하천의 수중생물에서 진통제, 항생제 등 15종의 의약품 성분이 검출되었다. 이는 누군가가 별생각 없이 버린 폐의약품이 부메랑처럼 사람들의 식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놀랍게도 한해 1천억 원대 약품이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직장인 10만 명이 낸 건강보험료가 매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약이 남는 이유의 하나는 대부분 건강보험이 적용되다 보니 쉽게 살 수 있어서일 것이다.

폐의약품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나라에 미국과 유럽이 손꼽힌다. 미국은 환경청 보호국이 2008년부터 폐의약품의 환경파괴를 강조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0년부터 폐의약품 수거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홍보 부족과 국민의 인식 부족으로 수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아직 법적 규제가 없고 지역마다 일관된 규칙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다행히 세종시에서는 올해 1월부터 약국이나 보건소, 주민센터에 내던 폐의약품을 우체통(물약을 제외한 알약)으로도 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우편물이 적어 철거 위기에 놓인 우체통의 재활용방안을 우정사업본부가 참신한 아이디어로 고안한 것이다. 7월부터는 서울시에서도 이를 본받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시민들의 인식을 바꾸려면 적극적인 홍보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약이 남을 때는 어떻게 버리면 되는지 약 봉투에 표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약국에 홍보문구를 내거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접근성이 좋은 아파트 재활용수거함 옆에 폐의약품 수거함을 두는 것도 참여율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여주고 삶의 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고마운 약을 지금처럼 무심코 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언젠가는 독이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천애란 (사단법인 색동회 울산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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