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출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학술적 재조명 점화
울산 출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학술적 재조명 점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7.02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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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이관술과 그의 시대’ 역사학계 관심 집중 
-“이관술 연루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미군정이 조작”
-“이관술은 민족의 이익 위해 죽음 두려워하지 않아”
-“이관술은 일제후기 국내 항일독립운동 상징적 인물”
울주군 언양읍 반곡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반곡국민학교창건기 비석 뒷면. 범서 이관술이 1947년 이 학교 건울 신축을 위해 토지 542평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울주군 언양읍 반곡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반곡국민학교창건기 비석 뒷면. 범서 이관술이 1947년 이 학교 건울 신축을 위해 토지 542평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울산 출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이관술(1902~1950)에 대한 학술적 재조명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와 수선사학회는 지난달 29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 소향강의실에서 ‘이관술과 그의 시대’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공동으로 열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연구의 시동을 걸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임성욱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이관술이 피의자로 지목돼 무기징역형을 받게 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1946)’은 미군정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임 교수는 “(이 사건은) 이관술이라는 인물의 마지막 4년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미군정이 자신들이 저지른 경제정책 실패의 책임을 조선공산당에게 떠넘기고 좌익세력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기 위해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관술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라는 주제발표에서 2015년 발표된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라는 제목의 자신의 논문에서 밝힌 내용을 다시 인용하며 이 사건의 전개과정을 수사시기와 재판시기, 재판종결 이후시기로 나눠 설명했다. 

그는 이관술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제강점기의 항일혁명투쟁가와 해방이후의 국가폭력피해자 로 나눠 볼 수 있다”며 “우리 역사학계는 이 사건과 이관술에 대해 재조명하는 노력이 뒤늦게도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학술대회에서 박한용 한국사회조사연구소 연구원은 ‘’반제동맹사건과 이관술‘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이관술은 일제말 국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며 해방후에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유력정치인이었다”고 설명했다. 박 연구원은 또 “그런 이관술은 파렴치한 위조지폐범이자 빨갱이 반국가사범으로 낙인찍혀 치욕과 망각의 땅에 그의 이름을 묻게 됐다”고 덧붙였다.

전명혁 동국대학교 연구교수는 ‘이재유그룹과 이관술’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이관술이 1933년 반제동맹사건으로 검거됐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1934년 3월부터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기 직전인 1938년 12월까지의 행적을 소개했다. 전 교수는 이관술의 동생이자 동지인 이순금의 신문 기고문을 인용해 “이관술의 반생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적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말과 행동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교수는 이관술에 관한 신문조서들의 신뢰성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임 교수는 남아 있는 신문조서들에 대해 “모두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운동당사자들의 기록과의 교차검증이나 동료조직에 위해를 주지 않는 사안에 대한 진술 등을 가려내면 사료가치가 있는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대회는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배제하거나 저평가해온 기존의 역사학연구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됐다. 100여 명이 참가해 예상 밖의 성황을 이룬 이날 대회는 열띤 토론이 이어지며 예정시간 보다 한 시간이나 더 진행됐다. 

이관술은 울산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에서 성장했다. 중동학교와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치하에서 조선반제동맹, 경성재건그룹, 경성콤그룹 등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해방후에는 조선공산당 최고위직인 중앙검열위원에 선출돼 정치활동을 했다. 미군정 당시 조선공산당은 합법정당이었다.

이관술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돼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6.25 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로 사망했다. 이관술은 수감중이던 1947년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반곡초등학교 건물 신축을 위해 토지 542 평을 기부했다. 

이관술의 유족들은 2012년 “이관술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2015년 “국가는 유족에게 1억6천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냈다. 2019년에는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강귀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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