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운 슬픔
새삼스러운 슬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6.2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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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정훈-새들반점

원고(原稿)를 꼭 시고(詩稿)라 읽는 사람, 시문 초벌을 초고(草稿)처럼 아끼고 이를 보듬고 오래오래 빚어 마침내 시(詩)를 짓는 정훈 시인. ‘그는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사라져 버린 얼굴이 글자로 남았지만 스산했던 그 날의 그림자는 꽁무니를 남기지 않더군요/ 다 떠나버리고 남은 먹구름 한 자국,/ 쌓이고 쌓여 그대 얼굴 그림을 이제야 알겠습니다<‘글은 모든 그리움의 무덤’ 부분>

그 반점에 오래전 가본 적이 있다. 지금은 어떤 연유인지 사라지고 없는. 아마 이름처럼 새들은 둥지를 벗어나 어느 하늘을 날고 있겠지. ‘새들반점’은 부산 중구 영주동 새들 맨션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시인은 ‘새들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만 부리를 뉘었다’고 말하는 먼 도심(都心)인 원도심(原都心)을 사랑한다. 가끔 연산동, 괴정, 덕천, 미남 로터리 등지에서도 발각되건만 여전히 초량, 영주동, 보수동, 동광동을 끼고 산다. 그가 지나친 곳은 어김없이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는 페이소스와 흐릿한 유머도 빠트리지 않고 장착되어 있다.

시집 약력 칸에는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자랐다고 짤막하게 언급되지만 평론가라는 점은 밝히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른 이가 설명한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못한 사람이 평론가가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기 검열이 심해서다(중략). 그런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날려버렸다. 그의 평론은 시보다 더 아름다웠다.’(고영란, 인문 무크지 ‘아크’ 편집장이 쓴 발문, ‘몇 번의 윤생(輪生)에도 낯선 그의 등짝에 피어난 고독’에서)

시집에도 그런 흔적을 남겨뒀다. ‘사랑의 미메시스- 영주동’과 ‘사랑의 미메시스- 너의 뒷모습’이라는 시에서. 이미 같은 제목 평론집과 비평집,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을 먼저 상재(上梓)한 바 있다. 그는 평론 쓰기를 그만둔 게 아니라 ‘돌아가신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결심으로 시인으로 변복(變服)했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 다닐 때까지 줄곧 시를 써 온 내공(內功)이 발현(發現)된 셈이다. ‘평론가는 타인의 언어와 문장의 간극(間隙)을 메우는 사람’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2년여 묵혀둔 글들을 갈무리해서 해바라기 시켰다. 시인 대접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다. ‘내 시가 좀 더 서먹서먹했으면, 그래서 쉽게 초대할 수 없는 당신이었으면 한다’는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일상 흔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추격하는 시인은 남에게 말하듯 자신에게도 다짐한다. ‘참 잘 읽은 놀빛 언어, 라 꾹꾹 찍어서 마침내 펼치게 될 생각의 파노라마를, 그 사이사이의 고통과 절망의 법규를 나를 사랑한다’<‘행복’ 부분>

시인이 남겨 둔 시들은 새들처럼 젖은 날개로 그리움 쪽으로 날아가는 슬픔이 반짝인다. 웅숭깊은 만남, 따뜻한 체취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어서 그러하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등 가족사는 공통분모처럼 앓고 가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다. 어머니 신발 뒤축, 아버지가 남긴 ‘사흘론’, 작은 누나가 남긴 문자, ‘이만 원만 빌리도’. 가슴 저미게 만드는 먹먹함은 우리 이야기나 마찬가지.

포획(捕獲)하지 않고 포착(捕捉)하는 시인은 한가지 소망이 있단다. ‘앞으로는 서정시보다 관념을 탐구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조만간 없어진 ‘새들반점’을 기억하며 ‘계림 영역’에서 삼종기도 드리듯 거룩하게 막걸리를 함께 마셔야겠다. 최근 ‘부산 북항’을 마무리 지은 시인 다음 발걸음에 동행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아흔도 거뜬히 넘긴 듯한 노파가 반쯤 접힌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들어와서는 짜장면을 시킨다/ 새들처럼 지아비 날려 보내고 자식들마저 둥지를 떠났겠지/ 숙취에 겨워 종일 누워 있다 허기를 달래려 찾아 든 새들반점, 나는 중력에 못 이겨 시름하며 가까스로 짬뽕을 넘기지만/ 노파, 마치 세상을 굽어보듯 팔꿈치 가지런히 올리고선 끼니를 건져 올리신다/ 노파와 나는 똑같은 의식을 벌이지만 대체 왜 내 몸은 가라앉고 노파는 홀가분해지는 것만 같으냐/ 새들처럼 날아가지도 못하면서 어찌 나는 기어이 숨어들려고만 하는가<‘새들반점’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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