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영화 ‘더 웨일’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6.1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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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상처를 먹는다. 그때 그 상처에서 베어나온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흘러내린다. 나이가 들면 슬픔은 날마다 쌓여가고, 해서 가끔 비 오는 날이 좋아지곤 한다. 마치 세상이 대신 울어주는 거 같으니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에서 찰리(브랜든 프레이저)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서 에세이를 가르치는 강사였던 그에겐 아내 메리(사만다 모튼)와 딸 엘리(세이디 싱크)가 있었지만 자신의 어린 제자와 바람이 나 지금은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했던 그 제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찰리는 폭식에 빠져 지금은 272kg의 거구가 됐다. 참, 그가 사랑했던 제자는 같은 남자였다.

그러한 슬픔 속에서 그를 더욱 막막하게 하는 건 점점 다가오는 죽음. 건강에 대한 오랜 방치로 그에게 남은 삶은 이제 고작 일주일 정도였다. 그 무렵, 찰리의 곁에는 전담 간호사인 리즈(홍 차우)가 있었고, 젊은 선교사인 토마스(타이 심킨스)도 가끔 찾아왔다. 그분(神)을 통해 찰리의 어두운 영혼을 구원해주겠다며.

하지만 찰리에겐 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 하나 찾아왔으니 바로 자신의 딸 엘리(세이디 싱크)였다. 죽음을 앞둔 찰리는 병원 치료도 거부한 채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후에도 늘 그리워했던 엘리를 집으로 부른다. 마침 엘리는 낙제를 면하기 위해 작문 과제를 대행해 달라고 에세이 강사인 찰리에게 요청했고, 그걸 계기로 찰리는 이번 주 동안 꾸준히 오면 과제도 도와주고 전 재산도 주겠다는 제안을 건넨다. 그런 엘리는 올해 17살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으로 갈수록 반항적이고 삐딱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아, 맞다. 멈출 수 없는 폭식을 채워 줄 피자배달부 댄(사티야 스리드하란)도 가끔 찰리의 집을 방문했다. 그렇게 찰리의 집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죽음을 앞둔 그의 어둡고 막막한 슬픔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걸 알아서였을까. 남은 일주일 동안 바깥엔 비가 자주 쏟아져 내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으면 삶은 ‘바다’가 된다. 최초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은 시냇물과 강물을 이룬 뒤 마침내 바다에 당도한다. 처음이라 깊게 패인 계곡(상처)에서 흘러나온 슬픔은 시냇물과 강물을 거치면서 모이고 모여 마침내 슬픔의 바다를 이룬다. 그렇게 슬픔이 넘쳐흘렀던 찰리의 집은 차라리 바다였다. 그리고 272kg이라는 거구의 고래(whale) 한 마리가 그 어둡고 막막한 바다(슬픔)를 헤집고 다니며 헤엄을 쳤다. 때문에 집 밖에서 쏟아지는 비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집안은 이미 바다니까. 그랬다. 어둡고 막막한 바다 속이었지만 찰리는 웃음과 위트, 그리고 진실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수면 위에서 가늘게 내리쬐는 한 줄기 빛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 빛은 바로 자신의 딸인 엘리였고, 마지막까지 엘리의 삶을 챙기면서, 그러니까 그 빛을 향해 가면서 찬란하게 수면 위로 부상한다. 고래가 수면 위로 점프를 하듯. 그분(神)에게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구원한 것이다. 원래 그렇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강하기 때문에.

<더 웨일>에서 주인공 찰리는 사실 그 역을 맡은 ‘브랜든 프레이저’라는 배우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인물이다. 밀레니엄을 전후해 <미이라>시리즈로 한때 글로벌 톱배우가 됐던 그였지만 배우자를 잘못 만나 결혼하고 얼마 뒤 엉망진창이 된다. 바람을 핀 것도 아닌데 아내와의 이혼 과정에서 그는 매달 1억원씩 총 120억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때부터 배우로서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 그렇게 브랜든의 삶은 어둡고 막막한 바다 속으로 침몰해갔다. 간간히 TV시리즈 등에 출연했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멈출 수 없었던 폭식은 그가 <미이라>시리즈의 히어로 브랜든인지 시청자들이 몰라볼 정도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는 더욱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런 그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이가 바로 이 영화의 감독인 ‘대런 아르노프스키’였다. 적당한 배우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묵혀 뒀던 <더 웨일>의 주인공으로 브랜든을 캐스팅한 것. 그리고 브랜든은 <더 웨일>의 찰리 역으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수면 위로 화려하게 점프했다. 한 시상식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수상 소감을 밝힌다. “컴컴한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신다면 이 말을 기억하세요. 여러 분도 저처럼 다시 도전하세요. 빛을 향해 가세요.”

2023년 3월 1일 개봉. 러닝타임 117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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