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천(槐泉)과 이휴정(二休亭), 그리고 강의계
괴천(槐泉)과 이휴정(二休亭), 그리고 강의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6.15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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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강의계(講誼契)를 가졌다. 이 모임은 이휴정 이동영(李東英, 1635-1667)과 괴천 박창우(朴昌宇, 1636-1702) 두 분을 위해 만들었다. 양가 후손들은 서로 세의를 돈독히 하여 선조의 뜻을 영원히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향중 선비들의 권유에 따라 계를 맺었다고 하는 만큼 울산향교 전교 외 지역 인사 여러분들도 참석했다. 특히 구강서원 원장이 함께한 것은 양 선조가 서원 창설에 크게 기여한 점을 상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강의계는 1938년 봄에 맺었으니 올해로 85주년이 된다. 이보다 231년 전인 1707년에 수계(修契)를 했다고 전해진다. 1707년은 이휴정 공이 몰하신 지 40년, 괴천 공이 몰하신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모임을 발기한 연도와 열한 분의 발기자 명단이 적힌 고문서가 있었으나 어느 시점엔가 분실되었고, 그 외 다른 기록물들이 전하지 않고 있어서 아쉽지만 공식적으로는 수계의 원년을 1938년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 선조의 수교(修交), 즉 언제부터 친구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두 분이 미수 허목 제자라거나 성균관에 동문수학한 것은 사실이나 시기나 장소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각각 울산과 영천에 살았으므로 어디에선가 같이 공부할 때 처음 만난 것 같다. 다만 괴천 선조가 남긴 제문에 “묘세상우 일견허지(妙歲相友 一見許知)”라는 표현이 있어서 시기의 추론은 가능하다. ‘묘세’는 스무 살 안쪽의 젊은 사람을 가리키므로 스무 살 이전에 처음 만나 친구가 된 것은 참이다.

강의계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節目)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총 17개 절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명칭은 정의를 두텁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목적은 글의 첫머리에 이미 기술하였다. 절목 중 양 선조의 묘제일에 어포를 지니고 서로 묘제에 참석키로 한 점은 지금도 해마다 이행하고 있다. 계원 간에 혹 과실이 있으면 서로 격려하고 경계하여 바로 잡는다든지, 선조의 은혜를 모르고 의리를 배반하는 자는 경계하기로 한 점도 유의할 만하다.

이휴정 공은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주선으로 괴천 공이 울산으로 이사한 지 3년 만의 일이었고, 사마시(司馬試)에 동방 입격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이에 괴천 공은 두 차례의 제문과 7연이나 되는 칠언절구의 만사(輓詞)를 고인에게 올리며 친구를 기렸다. “헌칠한 신장이며 단정한 용모에 마음도 넓었고, 도량 또한 위대하였고 모가 나지도 않았다. 청운의 갈림길을 빠르게 진보하여 명당의 수완 있는 관리가 되었다. 필력은 철과 은의 갈고리와 같았다….”

괴천 공은 자신이 쓴 글에서 고구(故舊)의 이른 하세에 대해 무척이나 비통해했다. 사귐이 얼마나 깊었던지 두 사람 사이를 ‘이성골육(異姓骨肉)’이라 표현하며 양가 후손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옛날에 놀던 곳을 뒤돌아보니 눈물이 흘러 차마 이르러 쉴 수가 없구나. 내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끌어내랴. 내 영원히 잊지 않으리다. 양가의 후손들이여, 불매하신 영령은 감응하시고 뜰에 왕림하시와 흠향하시옵고 이 마음 이 정성 굽이 살피시어 밝게 비추어 주옵소서.”

괴천 선조가 이휴정 선조와의 교의를 나타낸 글은 또 있다. <남이록, 南移錄>과 <계자손서, 戒子孫書>가 바로 그것이다. <남이록>에는 영천에서 울산으로 이거한 이유와 옮길 때의 경위, 이휴정 공의 자상한 배려 등이 적혀있다. <계자손서>는 필자의 손을 거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이 자손에 이르는 글이 중심이나 영천을 떠나야 했던 이유와 이휴정 공과의 관계 등도 소상하게 적어놓았다.

괴천과 이휴정 양 선조의 우의가 시작된 지 370여 년이 되었다. 양 선조의 우의는 ubc 특집 다큐 <강의계, 360년의 우정 / 2015. 12.>에서 조명받은 바 있다. 괴천 선조의 울산 정착 이후 가르침이 커서 울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이 크게 미쳤고,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지역을 선도했다. 이휴정 선조의 후손들은 조상의 선업이 괴천 공 후손들의 발흥(發興)으로 이어진 점에 대해 반기는 마음이 크다. 두 가문의 후손들은 양 선조의 우의를 선양함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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