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만 있어도 디자인이다
한 권만 있어도 디자인이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5.2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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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데이미언 톰슨-책과 집

가끔 지인 집에 초대받을 경우가 있다. 주인이 직접 집안 곳곳을 안내하기도 하지만 대개 미리 준비된 식탁에 앉게 마련이다. 난 그러질 못한다. 반드시 서재든 서가든 책장이든 그 공간을 먼저 살펴본다. 대부분 글이라는 매개로 만나게 되는 ‘동업자’여서 자연스럽다. 놀라기도 하고 간혹 실망하기도 한다. ‘마당’보다 ‘책장’을 더 사랑하는 필자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오래전 김서령 작가가 쓴 ‘가’(家)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집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찾아가는 내용이다. 여러 사람이 사는 집 소개를 한다. 그중 한곳에 오래 머물렀다. 특별히 눈에 띈 한 사람, 신화학자이자, 번역가, 소설가인 이윤기 선생. ‘양들의 침묵’ 초판본을 번역했고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로마 신화’ 시리즈도 선생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집은 김 작가를 통해 간접 경험했지만 놀라웠고 아름다웠다. 서재 이름이 ‘과인제’(過人齋)다.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서(藏書)에 스며든 그 사람 삶이 묻어났다.

서울 별마당 도서관 ‘만남의 광장’에 가본 사람은 안다. 높이 십삼 미터에 달하는 책장에 움찔한다. 여기에 진열된 책만 해도 7만 권이 넘는다. 하지만 여기에 채워진 서가는 모두 진짜 책은 아니다. 공간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울산도서관 로비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도 닮은 꼴이다. 그곳이 무엇을 품고 있는 장소인지 단박에 알게 한다. 이미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선책이다. 이 점을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이 디자인이다.

잡지 편집자이자 디자인 세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 데이미언 톰슨이 쓴 ‘책과 집’도 그러하다. ‘갖고 싶은 나만의 공간, 책으로 꾸미는 집’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렸지만 치장(治粧) 혹은 장식용으로서 서가(書架)만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서재를 꾸미기 위한 비결인 인테리어 요령도 제공하지만 책과 어울리는 집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가 중심 내용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사업가, 건축가, 작가, 디자이너 등 다양하다.

정리 정돈은 집안일에 있어 최우선 과제다. 청소며, 빨래며 수납하는 일도 그러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도 반드시 ‘책 정리’가 필요하다. 방법은 개인차가 있다. 쌓아두든지 방치하든지. 하지만 대부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에 둔다. 장서가(藏書家) 성격, 취미 등이 가장 잘 나타난다.

필자 책장 중 한 곳은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햇빛이 든다. 할 수 없이 종일 블라인드를 쳐둔다. 책이 바래질 위험이 있어서 그렇다. ‘서재 결혼시키기’ 저자, 앤 패디먼도 그리했다고 알고 있다. 책을 지키는 방법은 서재를 어떻게 꾸미는가에 달렸다. 과시용이라도 해도 그러하다. 책은 가구가 아니지만 집을 더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방편이 된다.

책을 이용한 집 꾸미기는 과연 어떻게 하면 될까? 오래전 벼락부자들은 그리했다. 비서를 대동하고 청계천 헌책방을 방문, 서점에 쌓여있는 책을 ‘여기에서 저기까지’ 싹쓸이하게 했다. 때론 양장본이나 전집만 주로 골라 유리가 박힌 책장 안에 모셨다. 소위 ‘갑빠’(가슴 근육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지만 은근 자기 자랑을 일컫는다)를 위해서다. 좋다. 다 좋다.

생활 공간 중심에 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집안 공기와 분위기는 바뀌는 법이다. 사실 책 이야기는 항상 조심스럽고 어렵다. 하물며 책을 위한 서재라니. 짜증 나고 불쾌할 수도 있겠다. 다만 밝혀두고 싶은 말은 이렇다. 기억 한 편을 꺼내 두면 마음이 편할까? 보고 싶은 책은 많고 돈은 없고 도서관조차 멀어 난감할 때 어떤 연유(緣由)로 내 손에 들어 온 책 한 권, 읽다 잠든 머리맡, 밥상조차 없어 한 끼 냄비 밥상이 되어 준 책도 삶을 세운 훌륭한 모자이크자 디자인이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장서가(藏書家) 기준이 3천 권이란다. 난 그 결정에 반댈세. 단 한 권이라도 서가나 책장이 아닐지언정 내 속에 꽂힌 한 권이 나를 살려냈고 살려준 은인일세.

‘꾸미는 일’은 타인에게 보이는 일이 아니라 나를 단속하는 무장(武裝)이라는 점에서 ‘책과 집’은 디자인이 아니라 동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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