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과의 대화 下…통도사의 비사(秘史)
큰스님과의 대화 下…통도사의 비사(秘史)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5.25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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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스님은 이 대목에서 신바람이 나신 듯했다. 말끝마다 힘이 실리고 말씀은 길어졌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손위 스님들한테서 들은 이야기인 데다 폐사(廢寺) 직전의 통도사를 기지로 살려낸 뜬구름 같은 이야기인지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도 실마리는 ‘한지’였다.

“조선 시대에 종이를 많이 뜬 곳은 말사(末寺)까지 합치면 통도사가 제일이었지, 그런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 나라에서 종이를 사는 게 아니라 공출로 앗아갔고, 그 바람에 통도사가 폐사 위기에 놓인 것이지.”

큰스님은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갔다. “운흥사 종이 몇 축, 어디 몇 축, 하는 식으로 종이를 1년 내내 죽도록 떠서 달라는 대로 갖다 바치면 관리(아전)는 먹으로 ‘不良(불량)’이라고 매기는데 그러면 또 떠서 가져가야 하는 거라. 중이 안 살고 떠나면 절이 망하거든. 통도사에서 그런 일은 없어도 운흥사에서는 종이를 뜨다가 죽을 지경이 된 스님들이 절에 불까지 질렀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은 나지.”

큰스님에 따르면, 조선조 말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고, 지방에서는 농민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 나라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통도사는 억불(抑佛)정책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는데 종이공출만 심한 게 아니라 잡역(雜役)의 짐까지 지게 됐으니 온 절간이 뒤숭숭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그 무렵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밭에 나가 일하고 종이 뜨고 하면 우린 사실상 손이 없었어. 그런데도 숫자로 따져 몇 명 보내라 하는데, 절에는 위계질서가 있잖아요. 큰스님들이 계시는데도 저쪽에서는 큰스님 작은 스님 안 따지니 할 수 없이 나이 많은 스님들도 부역을 나가야 했으니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거라.”

그때 몇몇 스님들이 묘안을 떠올렸다. 이 이야기 직전 큰스님이 “그 이야기 좀 해야겠다”며 말 타래를 푸신다. 말씀인즉슨 이랬다. 하루는 몇 안 되는 스님들이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는 한 스님을 모셔와 앉게 한 뒤 일제히 큰절 삼배(三拜)를 올렸다. 이때부터 큰스님은 이야기꾼으로 변신하신다.

“온 스님이 ‘우리가 폐사 직전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스님이라야만 이 절을 폐사에서 구제해줄 수 있다면서 그 스님에게 절을 해대는 거라.’ 그러자 이 스님이 ‘최고 큰 스님도 아닌데, 각중에(갑자기) 와 이라노, 이 사람들이’ 하며 정신이 없어 하는데, 대중 스님들은 ‘저 스님이면 되겠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거라.”

우리 일행은 점점 이야기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큰스님의 말씀도 세기를 더해갔다. “왜 아느냐? 통영에 지금의 지사 격인 관찰사로 ‘권돈인’이 부임해서 취임식에 지방 유지들을 초청했는데, 이 스님이 관가의 작은 출입문이 아닌, 관찰사나 조정의 높은 사람이나 다니는 큰 솟을대문으로 들어간 거야.”

권돈인(1783∼1859)이라면 조선 후기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낸 문신이자 서화가다. 다음은 큰스님의 부연설명…. “그런데 통영 관찰사 권돈인이 취임할 때 솟을대문으로 들어간 이가 바로 통도사의 이 스님이었고, 다른 스님들이 그 사실을 알았던 거라.”

조선 후기, 영축총림 통도사 스님들이 지역과 잡역을 면제받고 폐사의 위기에서 벗어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 이면에는 이 같은 비사(秘史)가 숨어 있다. 누에가 실을 뽑듯 한참이나 이어진 팔순 성파스님의 말씀에는 젊은이의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통도사 부도전(浮屠殿)에 가면 ‘스토리텔링이 빠진’ <경암당(스님) 지역혁파유공비>와 <권돈인 고사유공비>를 지금도 만날 수 있다는 게 큰스님의 귀띔이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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