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과의 대화… 한지(韓紙) 中
큰스님과의 대화… 한지(韓紙) 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5.09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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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스님의 끝 모르는 한지 사랑은 울산 나그네들을 오래전 지구촌 속의 한지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이야기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일본이 서구하고 물물교류할 때 인기상품은 일본 종이와 도자기였지. 그런데 그 무렵 일본에는 도자기가 없었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전쟁을 왜 일으켰겠어. 그때 강제로 끌고 간 조선 도공들에게 도자기를 많이 만들게 했고, 그걸로 서구와 물물교류할 때 이용했다 그러거든. 그다음 한지는 어떻게 되냐.”

큰스님의 말씀에는 가끔 옛날 용어가 섞이기도 한다. 입에 익은 탓일 게다. ‘한일합방(韓日合邦)’(→한일병합·韓日倂合, 경술국치·庚戌國恥)이나 ‘왜정(倭政)’이란 말이 그런 본보기다.

“한일합방 후에 일본 사람들이 조선종이를 지역마다 많이 만들도록 했고. 종이공장이 제일 많은 곳은 의령 신반이었지. 원주나 그런 데는 적었고, 여기(신반)는 교통이 제일 좋아 일본에 가져가기가 수월했던 거라.” 길손들은 여든 중반 큰스님의 해박한 지식에 새삼 놀란다. 이번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말씀이 이어진다.

“그렇게 조선에서 나온 종이를 사 간 일본 상인들은 ‘조선종이’라 안 하고 ‘일본 종이’라고 해서 서구에다 팔아. 손기정이 (마라톤대회에) 일장기(日章旗) 달고 나가고, 군에 징용돼 가면 ‘일본군’이지 ‘조선군’이 아니듯이…. 보국대고 뭐고, 국가가 없으면 그래 되는 거라. 조선 사람이 국적이 없다 보니 일본 국적으로 나간다니까.” 성파스님의 말씀은 누에고치가 풀리듯 길게 이어졌다.

“왜정 때 고려인삼하고 조선종이를 의도적으로 많이 장려했고 그다음은 양잠(養蠶)이었지. 진주나 대구에서는 그걸(누에고치)로 실크를 많이 만들게 해서 조선 사람도 먹고살게 하는 척하며 의도적으로 일본 걸로 만들어 다 보내는 거라. 그런 식으로 조선종이도 일본 종이로 둔갑시켜 유럽에 팔았는데, 알고 보면 조선종이 하고 일본 종이는 질에서 차이가 엄청났어.”

특별강의의 실마리는 다시 조선종이 한지(韓紙)로 돌아온다. “몇 년 전 ‘직지(直指)’ 때문에 유럽에서 한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분석해보니 우리 한국 종이가 제일 좋은 거야. 그동안 서구의 문화재 수리를 일본 종이로 했는데 그것이 조선종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요즘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팀이 한국에 몇 번이나 와서 조사하고 갔어요. 한지가 아직도 일본 종이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지.”

말씀에 따르면, 루브르 박물관 팀은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한국을 여러 번 다녀갔다. 원주나 문경 현지에서 답사를 많이 했고 지금도 한국 종이를 꾸준히 사 가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런 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들려주신다. “문경 장에서 평발 한 장에 2~3천원 하던 것이 지금은 4만원, 5만원이나 불러. 유네스코 등재도 그래서 추진하는 거야.” (‘평발 한 장’은 우리네 예날 문종이 한 장 크기다.)

한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갔는지 궁금했다. 큰스님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고, 그만큼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꿰뚫고 계셨다. “올해 안에 한국 문화재청에서 먼저 지정이 돼야 한답디다. 지금 인삼재배기술하고 종이하고 (등재 신청 경쟁이) 붙어 있고, 그래서 종이가 되면 내년 5월에 (유네스코에) 신청할 거라고 해. 한국에서 먼저 지정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지. 한지 생산하는 사람들, 전에는 종잇값이 헐하고 생산비가 비싸서 먹고 살지를 못했는데. 앞으로는 생산해도 좋은 기회가 온 거라.”

예정에도 없었던 큰스님의 특강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下로 이어짐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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