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국정농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4.0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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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 TV 속 영화 이야기의 주인공은 ‘라스푸틴’이었다. 러시아제국 말기에 이 사람이 황제 니콜라이 2세 부부의 환심을 사서 국정농단(國政壟斷)을 일삼은 인물이다. 그의 러시아 황실 유린은 러시아 혁명 세력들이 황실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시기적으로는 100년 전 얘기이고, 여러 차례 영화화될 만큼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울리 에델’ 감독은 이 신비주의 예언가의 기벽괴담(奇癖怪談) 인생을 흥미롭게 풀어보기로 작심한다.

라스푸틴은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의 출혈을 멈추게 한 뒤 막후 실력자가 된다. 매점매석은 물론이고 자기 마음대로 수상과 장관을 임명하고 파면하기도 한다. 이후 종교와 외교, 심지어는 내정에까지 개입하면서 사실상 최고 권력자 권한을 행사한다. 당시 러시아는 후진적인 전제군주제와 농노제에 머물러 있었다. 치료와 예언 능력이 있었던 이 시베리아인은 황실의 적대 세력에게 살해되기 직전에 머잖아 황족들이 몰살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그의 말은 1917년 10월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현실화되었다.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이 러시아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러시아 황실은 무너졌고, 수많은 러시아인들은 내전의 희생자가 되었다. 라스푸틴 자신도 황실의 운명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국정농단은 러시아의 운명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제국이 라스푸틴에 의해 파멸되었는지, 부패한 황실이 한 인간을 지옥으로 몰고 갔는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다.

우리 역사에서도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각인된 사람들이 있다. 원나라가 쇠퇴 기미를 보이자 고려 공민왕은 자주노선을 걸었다. 그 당시, 신돈(辛旽)은 개경 현화사의 주지 승려로서 백성들의 신임이 높았다. 그런 연유로 공민왕은 그를 기용했다. 신돈은 환속한 후 개혁의 선봉에 섰다. 토지를 농민에게 배급했고, 양인 중 노비가 된 자들의 신원을 돌려주었다. 성균관을 중건했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등 흐트러진 국사를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이 무렵,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공민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신돈이 벼슬을 두루 겸직하면서 국정을 농단한다는 세평이 돌았다. 이에 왕은 권문세족의 반발을 핑계 삼아 그의 관직을 회수했다. 공민왕의 후궁인 반야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후일에 우왕과 창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 두 왕들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설이 퍼졌다. 이것이 과연 신돈의 해괴망측한 국정농단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개국 합리화를 위한 날조였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조선시대의 국정농단 차단은 실패를 거듭했다. 개국 초부터 피비린내 나는 왕권경쟁 과정에서 친족은 물론 처족이나 외족들도 피해자들이었다. 그러함에도 5백년 내내 국정농단이 이어졌다. 문정왕후와 장희빈이 그랬고, 노론과 송시열은 아예 그들의 나라였다. 대비들의 수렴청정과 외척들의 장기간 세도정치는 숱한 후일담을 낳았다.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왕권이 무력화된 탓이었다. 왕권을 회복한 흥선대원군의 섭정과 명성황후와의 대립은 조선왕조 몰락을 촉발했다.

국정농단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어졌다. 이승만 시절에는 반공을 빌미로 삼은 친일주구(親日走狗) 세력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다. 박정희 시절에는 차지철 부류의 과잉 충성파들이 장기집권을 부추겼고, 이는 끝내 대통령 시해로 이어졌다. 전두환 때는 군부의 발호가 극에 달했고, 이명박 때는 이른바 ‘영포(迎浦)라인’의 4대강 사업 개입설이 파다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국정농단이 전면에 부상했다. 최태민의 영향과 그의 딸 최순실의 비선 실세 행각은 결국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지금 정권은 어떠한가. 참신한 인물이 귀한지 묵은 인물들의 귀환이 두드러진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한국의 생존 전략이 위협받고 있어서 걱정스럽더니 ‘대일 굴종 외교’란 뒷말까지 들리는 판이다. 혹여 권력자 주변에 서성거리며 한자리 차지하겠다는 자들이 있다면 아예 거들떠보지 말아야 한다. 개뿔도 아니면서 철리(哲理)를 다 꿰고 있는 양 행세하는 자들의 정치성 발언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국정농단을 차단하는 일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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