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사랑은 지진처럼, 상처는 빛처럼
스즈메의 문단속 사랑은 지진처럼, 상처는 빛처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3.1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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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건 일상적이다. 또 가끔 안개가 끼거나 눈이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 폭우나 폭설처럼 지나치게 내리지만 않으면 그냥 그렇다. 허나 ‘지진’은 다르다. 지진은 존재 자체가 이미 일상적이지 않다. 아니 일상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나 집사람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학교를 가거나 출근을 하는 건 일상적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고 가끔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노닥거리는 것도 마찬가지. 혹여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에게 깨지더라도 그저 그런 일상의 연속이다. 허나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존재 자체가 이미 일상적이지 않다. 아니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그건 일상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기도 하다. 사랑은 언제나 지진처럼 온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주인공 스즈메(하라 나노카)에게도 사랑은 지진처럼 다가왔다. 여고생인 스즈메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타마키(후카츠 에리) 이모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은 뒤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한 청년과 마주치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기무라 타쿠야)을 닮은 듯한 청년을 보자마자 스즈메의 입에선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첫눈에 반한 것. 열여섯 스즈메의 일상은 그렇게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참, 청년의 이름은 소타(마츠무라 호쿠토)였다.

헌데 스즈메는 그렇다 치고 그날 스즈메가 사는 마을은 소타와 스즈메가 아니었으면 마을 주민들 전부 통째로 일상이 무너질 뻔했다. 대학생인 소타의 정체는 사실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진 발생을 막는 일을 하는 ‘토시지’였고, 그날은 스즈메가 사는 바닷가 마을에 지진이 일어날 예정이었지만 소타와 스즈메가 힘을 합쳐 막아냈다. 지진을 어떻게 막냐고요? 그곳 세상에서 지진은 일어나는 과정이 분명했거든. 그러니까 삶도, 죽음도, 시간의 흐름도 없는 현실 너머 저편 공간의 ‘미미즈’라는 존재때문에 일어났던 것. 그 미미즈가 차원의 문을 통해 현실 세계로 뿜어져 나와 거대한 기둥을 형성하며 하늘 위로 솟구친 뒤 이내 땅에 떨어지면 그 충격파로 지진이 일어나는데 미미즈가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스즈메가 소타를 도와 문을 닫으면서 지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뭐 만화니까. 훗.

눈여겨봐야 할 건,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인 미미즈가 땅으로 추락하기 전에 소타가 문단속을 하면 지진이 아닌 비(雨)로 바뀌어 세상에 내린다는 것. 언제나 일상을 뒤흔드는 지진처럼 오는 게 사랑이지만 사랑에 빠지면 미미즈처럼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솟구친 만큼 추락을 하게 된다. 그 어떤 사랑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그럴 땐 소타의 문단속, 즉 마음 단속을 통해 지진이 아닌 비(슬픔)로만 내려도 참 다행이다. 어떤 사랑의 종말은 지진처럼 죽음을 불러오기도 하니까.

아무튼 공동 문단속을 계기로 스즈메와 소타는 친해지게 되지만 소타가 저주에 걸려 스즈메가 어릴 적 엄마로부터 선물 받은 작은 나무 의자로 변하면서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스즈메는 학교도 땡땡이친 체 백방으로 뛰게 된다. 소타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말이지. 하긴, 사랑에 빠졌으니까. 또 소타가 열라 잘 생겼으니까. 한창 연예인 쫓아다닐 나이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영화는 시작부터 스즈메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기 시작한 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간다. 스즈메의 상처는 2011년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시 엄마를 잃었던 것. 그때 스즈메의 나이는 고작 4살이었고, 아직도 스즈메는 가끔 지진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엄마를 찾아 돌아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헌데 스즈메의 오래된 상처는 후반부에서 소타가 걸린 저주를 푸는데 일종의 좌표가 된다. 사랑하면 상처받게 되고, 소타로 겪게 되는 상처가 위치한 공간과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상처가 위치한 공간이 같았던 것. 바로 ‘마음’이었다. 그랬다. 미미즈가 사는 현실 너머 저편도 마음이라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것에선 누군가 떠나거나 죽었어도 그리움에 여전히 살아 있고, 딱히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구분도 없다. 그냥 골라잡으면 된다. 과거의 기억이든, 현재의 상처든, 혹은 미래의 모습이든.

결국 스즈메는 그곳에서 엄마를 잃은 상처에 여전히 울고 있는 어린 자신과 당당하게 마주하게 되고, 그때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한층 성장하게 된다. 소타도 구하면서. 원래 그렇다.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건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고 타인의 질투를 유발할 뿐, 고통이나 상처가 오히려 사람을 성장시킨다. 주위도 둘러보게 하고. 해서 깊고 오래된 상처는 가끔 ‘북극성’같은 것이기도 하다. 늘 그 자리에서 빛을 뿜어내며 삶의 좌표가 된다. 2023년 3월 8일 개봉. 러닝타임 122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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