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파 큰스님의 구상
성파 큰스님의 구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3.14 2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님들의 동안거(冬安居)가 끝난 지 열아흐레쯤 되던 날 오전 일찍 영축총림 통도사 경내 서운암을 찾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종정인 ‘대종사(大宗師) 성파 큰스님’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울산과 연고가 깊은 남녀 스물예닐곱 남짓.

팔순 중반 노스님의 건강이 예전 같지만은 않으신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모습은 여전히 자비로웠고, 확신에 찬 말씀에는 힘이 넘쳐났다. “울산에서 정말 대단한 분들이 오셨는데 그냥 돌아가시지 말고 친목회라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덕담을 마친 큰스님의 역사(歷史) 이야기에 일행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놀랍게도 뜻밖의 말씀이 이어졌다. “(통도사의) 땅은 양산이지만 울산이나 양산은 같은 곳이어서 관심이 많았지. ‘울산 문화사’를 한번 제대로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야. 책이 한 권 나오든 두 권 나오든 정리를 하고 싶어서 지금 물밑작업 중이고….” 큰스님의 거처인 서운암 토굴은 서서히 ‘울산 문화 예찬론’으로 젖고 있었다.

“신라의 도읍은 경주지만 고대 국가의 원조는 울산이지. 성씨도 이쪽에서 출발해서 그쪽으로 갔고. 제일 특기할 건 우리 역사에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신라인데 그 원동력과 힘은 모두 울산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경주는 그냥 도읍이니까 진골·성골 귀족들만 살았고….” 전에도 이따금 듣던 지론이었지만, 큰스님의 말씀은 늘 당당했다.

소위 ‘강단사학자’들이 들으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스님은 역사 공부를 책으로 하기보다 현장을 누비며 수행처럼 하기를 즐기시는 분이다. 일본서도 그랬겠지만, 중국에서는 햇수로 5년이나 머물며 역사의 흔적들을 발로 뛰며 확인하셨던 분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말씀은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화제는 신라의 진골 출신 자장스님 쪽으로 옮겨갔다.

“울산 태화사와 경주 황룡사, 양산 통도사 모두 자장스님이 당나라에 다녀오신 뒤에 지은 절이지. 황룡사는 있던 절이지만 창건과 마찬가지로 크게 중창을 하셨고 통도사와 태화사는 없던 절이었고 새로 창건하셨지. 그러고 나서 11년 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고….”

큰스님에 따르면 황룡사는 신라 왕실의 귀족(진골·성골)들만 찾아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도하고 나랏일을 돌볼 고급인력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통도사는 일반 백성을 상대로 계(戒)를 받게 해서 인생관·세계관을 바꾸어주던 정신교육장이었다. 이 대목에서 큰스님은 ‘일자무식 서민’이니 ‘나쁘게 말하면 세뇌하던 곳’이라는 우스갯말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이끌기도 하셨다.

울산 문화 예찬론은 20분 가까이 이어졌고, 그중의 백미는 ‘울산 태화사’였다. “태화사는 말 그대로 국방사찰이었지. 그렇다고 종교 행사를 하던 곳은 아니고, 군사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관장하던 곳인데, 신라 정규군과 화랑의 본부는 경주가 아니라 여기였어. 경주 ‘화랑의 집’도 신라 때 본부 자리가 아니었지.” 삼국통일의 힘이 울산서 다 나왔다는 말씀이었다.

큰스님의 말 보따리는 풀면 풀수록 흥미를 더해 갔다. 자장스님이 제자 12명을 데리고 중국 당나라로 간 것은 단순한 ‘입당구법(入唐求法)’이 아니었고, 군사밖에 모르던 아우뻘 당 태종에게 행정과 법도를 가르친 일 같은 얘기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일행은 아쉬움 속에 자리를 떠야 했다. 오전 11시 반, 큰스님의 공양(供養)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값진 자리를 만들어준 김언배 울산대 명예교수가 이날 일정의 한마디 말로 매듭을 지었다. “큰스님께서 공양을 안 하시면 통도사 내 모든 스님이 공양을 못 하신다고 합니다.”

김정주 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