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울산 동구 방어진을 쓰고 그리다
50년 전 울산 동구 방어진을 쓰고 그리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3.0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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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김광열 -슬도

사라진다는 말은 없어지거나 지워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속에는 절대 잊히지 않은 기억이 존재한다. 오래된 시간일수록 흐릿해지기는커녕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들. 역사가 되었건 개인사가 되었건 말이다. 한 사람 기억으로 살아난 지역 이야기,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공간과 시간을 살려냈다. 역사학자 책처럼 내용이 촘촘하지는 않지만 수록된 글과 그림은 또 다른 1차 사료(史料)로도 더없이 훌륭하다.

울산 동구 출신인 김광열 씨가 쓰고 그린 ‘슬도’(瑟島). 그 지역 전부 아우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내용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은 휘발성이 강해 날이 갈수록 휘발(揮發)되기 쉬운 법이지만 그 시대를 잡아둔다는 일, 새겨둔다는 일은 매우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다. 반세기 전 지역 이야기지만 아득함 혹은 그리움으로 읽힌다.

50년 전 울산 동구 방어진이 중심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현대조선(현 현대중공업)이 들어서기 직전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를 다뤘다.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이가 기억을 되살려 재현한 기록 곳간이다. ‘역사는 꼭 왕조 중심으로 기술하라는 법은 없다. 개인의 삶의 기록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되리라 믿는다’는 신념이 이 책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

더러 누락 되거나 이 빠진 부분,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내용은 학자 몫으로 남겨둔다는 겸손이 더욱 고맙다. ‘이 책을 뼈대로 누군가는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연극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말하는 대목에서 징검다리를 놓았음을 확인한다.

‘묵은장’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열정이 오롯이 남아있는 책, 슬도.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별 제목이 좀 딱딱해 보이지만 한편 한편이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듯 다정다감하다.

1장은 외지인들이 보면 마치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손금보듯 자세하게 설명하며 ‘그래, 그땐 그랬지’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맨 앞에 둔 울산 최초 극장인 ‘상연극장’(1924년). 그가 처음 본 영화가 화산 폭발 영화 효시라 불리는 ‘자바의 동쪽’(1935년, 조지 멜포드 감독. 이 감독은 ‘이스트 오브 보르네오’도 만들었다)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울산 방어진 출신 연예인 ‘쓰리보이’ 에피소드도 흥미롭다.(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면 S가 세 번 들어가서 예명으로 사용했다. 본명 신선삼.)

이렇게 관심을 끌며 이어가는 이야기는 숨은 보석을 찾는 기쁨이 있다. 2장은 그 지역 경제 환경을 보여준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라 어선 진수식, 포경선, 댕구리 배, 꽁치잡이 배 등 각종 배 이야기를 비롯 선원 생활상과 기와집과 초가집, 나무하러 가는 날, 까칠한 호박잎에 싸 먹는 빡빡장, 설날 목욕탕과 이발소 그림까지 잔잔하게 펼쳐진다.

3장은 사회 문화를 다루었고 마지막 장에서는 방과 후 청소년 놀이문화를 소개한다. 본인이 그런 놀이를 하고 자랐으니 소재(素材)로 적절하다. 이제는 재연행사로 가끔 열리는 연 만들기, 팽이치기, 구슬과 딱지, 제기차기 등. 이중 ‘벼슬 진급 놀이’는 놀랍고도 씁쓸한 맛이 있다. 방안에 방석 5개를 두고 이어가는 가위바위보 게임.(이를 가시개, 바신도야, 울뭉치 라는 사투리를 사용했다) 진급 싸움에서 지면 최말단 5등급으로 떨어지는 설움도 감수해야 한다.

‘슬도’(瑟島)는 방어진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이다. 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해서 거문고 ‘슬’(瑟)을 붙여 그리 부른다. 바다 쪽에서 보면 시루를 엎어 논 듯해 ‘시루섬’ 혹은 곰보 돌이 많아서 ‘꼼보 섬’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년(幼年)은 이제 ‘노인과 바다’처럼 낡아가지만 되살려낸 추억은 기록으로 여전히 생생하다. 소중한 것은 다시는 잃거나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결심으로 읽힌다. 쓰고 그린일, 한때 살았거나 현재 사는 곳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헌사나 칭송은 어울리지 않지만 이런 책은 소중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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